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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지금 나의 영적 상태에 필요했던 책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지금의 내 단계에서 필요한 책, 하나님께서 책 한 권도 정확한 타이밍에 보게 하신다는 걸 깨닫는다.

나에겐 요셉이지만,

모두가 다윗을 이야기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야말로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삶의 모든 부분이 주님을 향해 있고,

아주 인간적인 모습들이 드러나며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는 모습까지,

모두가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현실성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는 과정들을 보면,

왜 다윗 다윗 하는지... 알 것 같다.

 

LEAP OVER A WALL

EARTHY SPIRITUALITY FOR EVERYDAY CHRISTIANS

 

1 이야기

다윗과 예수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무엇보다도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삶이란 전부 유기적으로, 개인적으로, 구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세한 것들이 현실화된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우리 삶에 경건한 모양을 부과하기 위해 억지로 그것들 속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한다. 자신의 상태를 개선시켜 보겠다고 하는 일이지만 참으로 무리가 가는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복음의 방식은 다름 아니라 이야기다. 이야기는 우리 삶에 무리를 주지 않는다. 도리어 이야기는 우리를 그 이야기의 삶 속으로 초대한다.

 

무엇보다 온전하고 충만한 사람이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삶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과 사건과 사람들의 전면과 후면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가 관계가 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 땅가 이 땅의 상황 - 날씨, 소화, 가족, 직업, 정부 - 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을 정의 한다.

모름지기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을 떄 가장 살아 있다.

인간 다윗으로만 볼 때 그는 별로 대단하지 않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법에 대해서는 그로부터 배울 것이 거의 없다. 그는 불해한 아버지였고 신실하지 못한 남편이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인간다울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의 이러한 모든 불완전함의 중심과 저변과 사면에 바로 하나님이 자리잡고 계시다고 말해준다. 우리에게는 바로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우리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 이름을 가진 인간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 1:1, 14)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20:31)

복음서 기자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알도록 한 뒤에, 이제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 인간으로서의 우리 자신-를 알도록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다윗 이야기에는 단 한번의 기적도 없다.

하나님이 그 이야기 플롯의 중심부에 계시며 그 모든 세세한 사건 속에 언제나(비록 대개 침묵하고 숨어 계시지만) 현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결코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을 그냥 우회해 지나쳐 가지 않는다.

예수님을 따르며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길을 부인하거나 피하거나 경시하게 하는 여러 가지 유혹을 자주 받는 다.

 

나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예수님이 구원하시고 성령이 충만한, 참된 삶을 살아갈 능력을 높여 주고 깊게 해주는 사람들과 사귀고 싶다.

그는 결코 어슬렁거리거나 빈둥거리지 않는다.

다윗 이야기는 진정 정열로 들끓는 이야기다. 바로 현세를 사는 영성이 그의 삶의 특징이며 그러한 정열의 이유다.

 

현세를 사는(earthy) : 뜬구름 잡지 않는(down-to-earth), 일상과 관계있는, 빨래하면서도 기도하고 교통 체증 속에서 노래하는.

영적(spiritual) : 하나님의 영에 의해 움직이고 활력을 받는,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2 이름

다윗과 사무엘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

"비록 보잘것없고 양이나 지키는 무명의 신세지만 나는 선택된 사람이다."

성경에 나오는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도 더 많은 플롯과 사건, 더 많은 인물과 배경을 제시하며, 우리에게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응답하며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다윗 이야기의 주인공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되기는 하지만 참으로 의미 심장하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뽑히는 것은 일반 투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믿음으로 사는 인간에 대한 성경의 중심 이야기가 평신도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신 이 이야기가 보여 주는 인간은, 약동하는 생동감을 가지고, 대담 무쌍하게, 창조적이고 예술적으로 사랑하고 기도하며 일하는 인간이다.

 

신앙이라는 모험을 감행한 사람들 대부분은 평신도다.

성인다운 그리스도인

하나님은 개인과 관계를 맺으신다. 즉 하나님은 구체적 이름을 가진 개인들과 관계를 맺으시지, 결코 일련 본호나 추상적 개념이나 목표나 계획과 관계를 맺으시지 않는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중한다는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이다.

 

3 일

다윗과 사울

사울이 비록 카리스마와 매력을 지녔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음을 보여 주는 표지들을 발견한다.사울의 눈에는 하나님보다도 사람들디 더 크게 보였던 것이다. 사울은 일을 잘 하려고 노력했고, 일을 잘 하고 좋은 왕이 되는 방편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했어야 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일과 예배, 예배와 일이 완전히 일치를 이룬 삶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권자시다. 인간의 일은 일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모습은 일하시는 하나님,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일할 떄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할 일을 받는다는 의미다.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을 네게 맡기겠다. 그리고 너는 그 일을 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가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분이 하시는 일을 통해서다.

우리는 일을 잘 하거나 좋은 일을 할 때 정말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급기야 우리는 자신을 신이라고 까지 생각하게 되기 쉽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며 성령을 받는 영성 생활의 일차적 환경은 바로 일의 세계

 

일이란, 일을 통해 자신의 주권을 표현하시는 주권자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그 하나님을 나타내는 활동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일하는 주권이며 일을 통해 표현되는 주권이다. 본디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주권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연장이요 거기에 참여하는 활동이어야 했다.

"주께서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주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사람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시 8:5-6)

 

거룩한 소명으로서의 일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주된 임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직업은 거룩한 직분이다.

우리가 왕으로 경배하는 예수님도 인생의 대부분을 목수 일을 하며 보내셨다.

이처럼 모든 진정한 일에는 섬김과 통치라는 두 요소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통치는 우리가 하는 일의 내용이며 섬김은 우리가 그 일을 하는 방식이다. 모든 선한 일은 참된 주권적 통치의 발현이다. 그리고 그 주권을 가장 바르게 행사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섬김이다.

우리의 일이나 지위가 의롭다고 해서 우리가 의로운 것은 아니다.

좋은 일을 맡았다는 것이 곧 좋은 일을 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사는 삶의 열쇠는, 어떤 직업이나 일을 맡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 있든지 우리가 그 일을 왕업으로 행하느냐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 준다.

혼돈 가운데 질서를 세우는 일이야말로 왕업의 기초다.

왕업을 행하는 사람들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휘파람을 불며 일한다.

 

 

4 상상력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라나고 깊어진다. 그 의미가 달라지지는 않지만 더 성숙해진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새로운 상황에 맞게 새로운 통찰을 가져다 준다.

모든것의 표면 뒤에는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는 않지만,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들만큼, 아니 어쩌면 그것들보다 더 실제적인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

진짜 나 자신이 되고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 삶 가운데 펼쳐지는 장소는 바로 우리가 왕업을 수행하기를 배우는 우리의 일터다.

악에 의해 우리의 상상력이 지배당하고 우리의 사고 방식이 좌우되며 우리의 반응이 결정되는 순간, 우리는 선한 것과 참된 것과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게 된다.

 

다윗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 자신에게 맞는 무기였다.

다윗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방법으로(사울의 무기를 이용해서) 일을 하라는 제안을 거절할 만큼 참으로 신중했고 참으로 대범했다.

우리가 하는 일만큼이나 그 일을 하는 방식도 중요하다. 방법 역시 우리의 기도와 신조에 맞고 일치하며 어울려야 한다.

중요성은 남들의 인정 여부가 아니라 그의 온전함과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에 달려 있다.

현실은 대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5 우정

다윗과 요나단

좋은 일을 했는데도 비난을 받을 떄, 최선을 다했는데도 느닷없이 심한 반대를 겪을 때 우리는 당혹하게 된다.

사울의 자고한 자아에게 하나님은 단지 소모품으로서 이용할 대상이었지 순종할 대상이 아니었다.

우정은 사실 우리의 영성에 기도나 금식과 다를 바 없이 중요하다.

우리가 굉장한 일을 하는 것은 특이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것도 특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하고 유지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요나단과의 우정은 다윗에게 그가 선택받았다는 것과 그의 소명과 상상력을 굳게 다져 주었다.

 

6 성소

다윗과 도엑

너무도 자주 또 너무도 흉하게 우리의 영성 생활을 타락시키는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과 나의 나됨이 별개가 되는 것이다.

 

7 광야

엔게디의 다윗

광야는 우리가 위험과 죽음에 직면하는 곳이지만, 맞이하는 태도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신비와 삶의 특별한 소중함에 직면하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떄 가장 인간다워진다.

광야는 사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8 아름다움

다윗과 아비가일

 

9 공동체

시글락의 다윗

똑같은 어려움이란 없다. 고통 역시 매번 다름 법이다.

살다 보면 우리 모두 어차피 광야를 경험하게 될 것이므로, 그 지역에 대해 미리 감을 잡고, 이 황량한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하나님이 그 광야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미리 알아 두고 보아 두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광야를 경험할 때 우리는, 거의 언제나, 거기서 도피하고 싶은 충동을 가장 먼저 느낀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도피 충동을 넘어 성경의 안내를 통해 광야를 기꺼이 맞이하는 자세를 갖추게 되기를 원한다.

영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신가이다.

우리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자신의 뜻을 완벽하게 이루신다.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가 손가락 하나 움직이면 그것이 도리어 블레셋을 돕는 셈이 되고 마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다.

 

우리는 결코 홀로 광야에서 생존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것을 가장 적게 인식하는 시간에 가장 심오하게 이루어진다.

 

10 관대함

브솔 시내의 다윗

이름은 중요하다. 이름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개인을 가리켜 준다.

큰 재앙은 사람을 최선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최악으로 만든다.

두 걸은 전진하고 한 걸음 퇴보하기도 했고, 한 걸음 전진하고 두 걸음 퇴보하기도 했다. 영성이란 본래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앙은 다윗에게서 최선을 끄집어 냈다.

다윗의 계획은 기도와 상담으로부터 나왔다.

 

"돌봄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일이다."

다른 이들과 함꼐하는(com) 따뜻한 정(passion)이었다.

함께 사는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자신의 안전을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감상이란 허울뿐인 자비심에 불과하다.

우리 시대 최고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우리 사회에 자아 성취에 대한 이야기와 책이 가장 많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자아 성취에 도달한 개인은 가장 적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자기 계발에 가히 광적으로 집착했지만 결국은 일종의 종교가 된 이기적 자기 중심주의가 유행했을 뿐이다.

 

11 슬픔

비가를 부르는 다윗

"잘 듣지 못하는 귀에다가는 크게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그리고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엄청나게 크게 그려 주어야 합니다."

삶을 완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죽음과 완전히 대면해야 한다.

그의 넘치는 열정과 비탄은 동일한 인생관, 동일한 가치관의 양면이었다. 즉, 삶은 소중하다는 생각 말이다.

시편의 70퍼센트는 비탄의 노래다. 이 비가들은 다윗의 기도하는 삶에서 직접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나온 것들이다. 다윗은 거듭해서 상실과 실망가 죽음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고난도 회피하거나 부인하거나 경시하지 않았따. 그는 모든 것과 정면으로 대면했으며 모든 것을 기도했다. 다윗의 비탄은 다윗의 장대하고 장중한 생명력의 표출이었다.

비탄이 없는 것은, 진리가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하신 일이 사울이 다윗에게 한 어떤 일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다윗은 바로 이것을 인정했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로 선택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좌우되고 움직이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깊이 경험하고 받아들디고 내 것이 된 고통은 시를 낳는다.

상실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최악은 현실과 대면하지 못하고 겉도는 것이다. 최악은 존귀한 것을 하찮게 여기고 신성한 것을 모독하는 것이다.

고통을 가능한 한 빨리 잊거나 할 수 있는 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 못 된다. '잊는다'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비인간적인 방식이다. 부인과 회피는 우리 문화가 상실을 다루는 가장 전형적인 처방이다.

당신의 십자가를 지라. 이것이 바로 부활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12 어리석음

다윗과 스루야의 아들들

그들은 우리가 다름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할 줄 모른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스스로 일을 벌이고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 속에 동참하고 그분에 관해 증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불 같은 성미와 독단주의와 완력의 결합은 치명적 결과를 낳는다.

차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폭력은 어리석은 방법이다.

일을 어떠한 방법으로 하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해야 한다. 이기적 이용(아브넬)이나 폴력(요압)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13 성장

다윗과 예루살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 5:10, 개역성경_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는 구절은 다윗의 성숙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변화는 우리 삶을 더 빈궁하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뿌리에서 단절시킬 수 있다.

그러나 변화는 또한 성장을 위한 촉매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삶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넓이를 키워 줄 수 있다.

미성숙한 사람들을 병적으로 겁먹게 만드는 것이 사실은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성숙한 사람에 의해 여지없이 폭로된 것이다.

단순히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며 자신의 삶 속으로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인다. 어 많이 섬기며 더 많이 사랑한다.

새로운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결코 성장할 수 없다. 하나님의 길은 성장이지 변화가 아니다. 성장은 유기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다윗이 통치하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때에 다윗은 서른일곱 살이었다.

 

다윗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서는 다윗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역시 그렇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읽고 있는 바의 대부분은 사실 다윗 안에 계신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유기적으로 발달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삶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행하실 때 그리고 순종하고 기도하는 삶이 우리 몸에 배어 갈 때 우리가 전 인격으로 되어 가는 무언가다.

우리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먼저 하나님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살피고 거기에 반응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먼저 하나님이 지금 어떻게 자신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고 계신지 살피고 그에 대해 감사와 순종으로 사는 삶이다.

 

14 종교

다윗과 웃사

하나님을 상자에 넣어 보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만 선을 넘는다. 우리는 하나님 자리에 서서 으스대고 까다로운 사람이 된다.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사는 길을 발견한 감격으로 신앙 생활을 시작해 놓고는 점차 하나님을 위해 그분의 일을 대신 떠맡아, 사람들이 바르게 살도록 만드는 일을 담당한다. 우리는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장 중요하신 분의 곁에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결코 하나님 관리 책임자 행세를 하지 않았따. 그에게 하나님은 구원자와 주권자이시며 목자와 바위셨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열기 전까지는 결코 온전한 우리 자신일 수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인다." "조심하라!"

귀먹은 이들은 언제나 춤추는 이들을 경멸하게 마련이다.

다윗은 신경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윗은, "충만하게 살아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이다"라는 것을 하나님을 두고 염려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근엄하고 고상하게 하나님 관리 책임자 행세를 하려 들다가는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영생이란 그분이 우리를 돌보시게끔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5 주권적 은혜

다윗과 나단

다윗은 보통 의미로서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심을 증거하는 자로서의 왕이다.

다윗은 왕이지만, 으레 정의되는 대로의 왕은 아니다.

그는 순종하는 종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며 공포하는 종이다. 다윗은 자신의 보좌를 하나님의 통치를 전하는 강단으로 사용한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꼐 도움을 청하느느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정직한 자세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잘 해 나갈 수 있는 삶의 분야는 단 한 가지도 없다. ㅣ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성경 곳곳에서 우리더러 소원 목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격려한다. 하나님은 후하게 주시며 아무리 주셔도 복이 동나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주는 것을 기뻐하신다. 주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분의 특기다.

주시되 다함없이 주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간청하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셨다.

다윗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청하는 데 대가였다. 그는 당차고 거침없이 간청했다.

 

하나님을 위해 거창한 인간적인 계획을 세웠지만 하룻밤 기도하고 나면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고 계신 일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됨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세워줄 것이다. 나는 네가 나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너를 통해 하는 일을 통해서 이 왕국을 세우는 중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하심보다 자신과 자신의 행함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왕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아무일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복음에 합당한 일거리일 떄가 많다.

다윗은 앉았다. 그 때 진짜 일이 시작되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는 것이다.

 

16 사랑

다윗과 므비보셋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랑이었다.

다윗은 안정된 자리에 오르자 사랑할 방법을 찾는 데 자신의 힘을 쓴다.

관대한 사랑이라고 해서 반드시 진실한 감사의 보답을 받는다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사랑이 다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언약을 살아 내는 일에서 우리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사랑의 언약을 지키는 일은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용당할 수 있다. 우리는 배신당할 수도 있다. 예수님이 그런 일을 당하셨고 지금도 당하신다. 아마 다윗도 그랬을지 모른다.

다윗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를 따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은 부패하지 않은 권력을 통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17 죄

다윗과 밧세바

죄가 대부분 그렇듯이, 다윗의 죄 역시 은밀하고 점진적인 과정을 거친다.

사실 모든 죄란 결국 같은 주제 - 스스로 신이 되려는 것, 자신의 삶을 제멋대로 하려는 것, 다른 사람의 삶을 지배하려 드는 것 -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결코 누군가 다른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당신 자신에 대한 것,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복음은 언제나 실제 사람, 실제 고통, 실제 문제, 실제 죄에 대한 것이다.

동정심과 분개는 우리가 끝도 없이 즐길 수 있는 종교적 감정으로서, 우리에게 굉장한 우월감을 불어넣어주지만 정작 우리의 삶은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설교의 예술이란, 우리의 삼인칭 방어망을 피해 돌아와서 이인칭으로 냅다 찌르고 그것이 일인칭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선언이 실은 소망이 가득 담긴 선언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으로 가득찬 선언이기 때문이다.

나의 죄를 인지하고 고백할 때에야 비로소 나를 나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인지하고 응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회개의 명령은 경고나 위협이 아니라 정직할 수 있게 하는 격려, 열린 곳으로 나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는 '의로운 해'를 맞이하라는 초대가 된다.

 

죄의 묘한 점은, 죄를 짓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죄라고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신이 된 듯한 느낌, 종교적인 느낌, 성취감과 만족감이 든다.

죄인의 자리는 책망과 정죄를 받는 자리가 아니라 구원을 받을 자리라는 소식말이다. 복음의 초점은 고발이 아니라 인정과 초대다. 인정: 죄를 깨닫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깨달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초대: 예수님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며 - 하나님이 이렇게 가깝고 좋고 매혹적인 분이시라니! - 사랑과 구원을 주시는그분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해주시는 분이다.

 

18 고통

다윗과 압살롬

믿음의 삶, 다윗 같은 삶, 예수님을 따르는 삶,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고통으로 부터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성공을 위한 마케팅 혹은 동기 부여 기술을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니다.

 

고통에는 역사가 있으며 그것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아무 연고도 없이 힘든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죄는 죄를 키운다.

다윗이 내세우는 합리화가 무엇이든 그 이면에는 용서하기를 거절하고 은혜 베풀기를 거절하고 자비 베풀기를 거절하는 마음이 숨어 있다.

광야는 다윗의 인격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시련은 다윗 속에서 최선을 끄집어 내었다. 고통은 우리의 태도에 따라 우리를 더 나빠지게 하는 대신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에 관한 진실과 대면했다.

자신의 가장 기본적 정체성은 '왕'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사실

고통 속에서 다윗은 기도를 회복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했다.

어떤 결정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혜로운 것인지.

 

 

19 신학

다윗과 하나님

"충만하게 살아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다윗의 실존의 가장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떤 것은 다윗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다윗이 온통 하나님으로 젖어 있었다는 증거는 그가 풍부한 은유를 썼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쓰이지 않을 때 그것은 불경한 표현의 재료가 된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없이 사용될 때 그것은 곧 사람을 억압하는 도구가 된다,. 아마추어든 전문가든 소위 신학자들 중에 기도하지 않는 이들은 가히 사단과 결탁한 이들이라 하겠다.

언어는 우리가 실재를 '자기 것'으로 삼는 주된 수단이다.

상상력이란 빈 곳을 채우며 행간을 읽는 능력이다.

모든 것은 현재적이며 삶을 위한 것이 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가 단연 가장 큰 요소다.

우리가 인감됨의 심장부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덜 중요한 도덕적 차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다윗은 행동한다. 다윗은 하나님께 받은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최고 영예 중의 하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동력으로 삼아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가 처한 삶의 여건을 당연한 것으로 가정한다.

성령님의 일하심을 막을 수 있는 여건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성령님은 결코 그러한 여건과 동떨어져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일에 그 어떤 여건이라도 이용하실 수 있다.

우리는 다윗이 어떤 여건에서 살았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일단 그저 은혜로 하나님을 얻는다. 그러고 나서 평생 동안 꾸준히 하나님의 방식으로 훈련받는다.

 

20 죽음

다윗과 아비삭

삶은 죽음으로써 완성된다. 죽음은 한계다.

참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음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숙고해야 한다.

타인의 삼은 나의 삶에 대한 제한일 수밖에 없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나의 삶을 가장 많이 제한한다.

삶의 제한을 존중하고 죽음을 존엄하게 대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깊이 있게 해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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