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appyFactory_/Book_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유대인 학자이자 히브리 사상가이며 인간을 사랑한 경건한 랍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개인주의가 인간을 경쟁과 다툼으로 몰아가는 오늘날,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내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건넨다.

여수에 계시는 예나 아빠에게 선물받은 책... 이 책을 보자마자 내 생각이 났다며 보내주신 책... 단락 단락, 깊이가 있고 너무 좋아서 빨리 읽어내려가기가 아까울 지경이었던 책.

깊이가 상당하고, 약간 철학적인 접근도 필요한... 뭐라 딱히 표현할 수 없지만, 정말 정말... 넘너무 좋았던 오랜만에 정말이지 브라보를 외친 책!!!!!

이 책에는 하나님이 하느님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이란 표현을 나는 하나님으로 다시 적겠음.... 내맘!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 1907-1972)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유대교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
흑인민권운동과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에 앞장선 사람.
소련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자유를 위해 활동한 사람.
기독교와 유대교의 대화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
기독교인들이 즐겨 읽고 인용하는 몇 안 되는 유대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

하나님은 의미한다. 사람은 그 누구도 혼자가 아님을,

일시적인 것의 본질은 영원한 것임을,

순간은 무한한 모자이크 안에 있는 영원의 상 임을.

거룩한 타자성 속에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있음을.

 

옮긴이의 말

오늘 날 심각한 문제는 신의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이다.

"위대한 개인"

천만 사람이 그르다 해도 옳은 것은 끝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온 세계 인구가 압도적 다수결로 신이 없다 해도 신은 살아 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돈, 돈 하며 돌고 돌아 마침내 미쳐간다 해도 홀로 초연할 수 있는 사람, 말하자면 이런 사람을 가리켜 "위대한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은 거기 극소수의 올곧은 의인이 없었기 때문이요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날 아직도 이 세계가 파멸되지 않은 것은 어디엔가 극소수의 의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살아남는 일이 우선 급하다. 살아남는 일(사람으로 사람답게!)이야말로 이 시절에 마땅히 온 힘을 기울일, 우리의 신성한 사명이다.

 

제1부 하나님 문제

1. 표현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감지

우리가 대우주를 인식한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으니, 우리가 반드시 그 대우주를 인식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 떄로는 가장 훌륭한 것은 우리 자신의 비밀이다.

사고는 그 대상과 결코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전에 이미 얻게된 인식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사고이기 때문이다.

행동은 언제나 인식을 뒤따르고, 생각은 이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삼는다.

우리의 지식은 일련의 회상이요,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빠진 것 투성이며, 그 이후의 두서없는 기억들의 조합이다. 우리가 새로 발견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기억부터 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바를 통해서 현재를 본다. 꿰뚫고 들어가는 대신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하며, 선입견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는 일은 결단코 없다. 기억은 흔히 창조적인 경험으로 들어가는 데 방해가 된다.

 

모르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아는 것에 대한 깨달음보다 먼저다.

개념들이란,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우리의 놀라움을 좀 더 완화시켜 보려고 하는 달콤한 군것질이다.

표현 불가능한 것에 대한 깨달음,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탐구는 시작되어야 한다.

 

2. 갑작스런 경이

의심에 빠질 때 우리는 질문한다. 놀람에 빠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질문할 것인지조차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언어를 쫓아가고 언어는 언제나 저만큼 물러난다. 그러나 위대한 경험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3. 세계는 하나의 암시

직관적 통찰은 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판단보다 먼저 있고, 그 대상을 지적인 범주들에 맞추기 전에 이루어진다.

우리에게는 알지 못하면서 갖는 확신이 있다.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존재할 만한 가치가 반드시 있음을 뜻한다.

 

4. 존재하는 것은 나타내는 것

장엄함은 우리로 하여금 지체 없이 외경하게 한다.

어째서 우주를 직면하면, 우리가 더 이상 우쭐거릴 수가 없는가?

공경은 언제나 밖에 있는 무엇을 향한다.

공경은 인간이 신비를 직면하여 토해내는 응답들 가운데 하나다.

그 의미라는 것이 인간의 생각하는 마음 바깥에서, 그것에 대한 주관적인 깨달음과 관계없이, 객관적 사물들 속에서 발생하는 무엇이라는 원리다.

언제나 사실은 의미와 섞여 있다.

 

과학은 우리에게 어째서 사물이 도대체 존재해야만 하는지, 어째서 자연의 법칙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법칙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논리적 필연성의 관점에서 설명해 주지 않는다.

우리의 지식 범주로 그 신비를 꿰뚫으려는 짓은 높은 담을 이발로 물어뜯는 것과 비슷하다. 과학은 표현 불가능한 것의 영역을 좁히기는커녕 오히려 더 넓힌다.

과학의 탐구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끝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중심으로 보이는 것은 다른 중심을 에워싸고 있는 면의 한 점에 불과하다. 한 사물의 옹글음, 그것은 참으로 무한이다.

 

존재하는 것은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To be implies to stand for). 모든 존재가 그것이상인 무엇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 알 수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 알 수 없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5. 감상으로 얻는 지식

끝없이 이어지는 낮과 밤 속을 걷다가 우리는 갑자기 엄숙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우리의 지혜라는 것이 먼지보다도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음악, 시, 종교 -- 이 모두가, 이성으로는 도무지 개념화시킬 수 없고 언어로는 도무지 명명할 수 없는 실재와 만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놀람이 없는 인생이란 살 만한 가치가 없음을 아는 데서 우리의 행복은 비롯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믿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놀라고자 하는 의지다.

깜짝 놀라 두려워하는 것이 곧 모든 사물이 나타내고 있는 바의 것을 드러내는 상징이요 표시다.

 

6. 언어를 능가하는 물음

옳은 대답을 얻을 수 있으려면 옳게 묻는 법을 알아야만 한다.

사물들의 숨겨진 부분을 보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그 신비를 감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자아는 마음(생각)을 등지고 있다.

실존한다는 것은 시간을 소유하는 것을 뜻한다.

 

7. 철학자들의 하나님

 

8. 궁극적 질문

의미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것도 인간의 은헤를 입어서가 아니다.

 

9.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

그분의 본질에 대한 그 어떤 지식도 획득하기 훨씬전에 이미 우리는 신의 현존을 직관하고 있다.

경이는 심미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상태가 아니다. 끝없는 경이는 끝없는 긴장이다.

끝없는 놀람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빚진 자라는 느낌을 새삼스럽게 한다.

세계는 사물들이 아니라 사명들로 구성되어 있다. 경이는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에 요구되고 있는 상태이다. 표현 불가능한 것은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대답을 할 것이냐 아니면 대답하기를 거절할 것이냐를 선택하는 일이다.

 

우리가 온 마음과 온 정신과 온 영혼을 기울여 생각할 때, 자아가 스스로 제 발로만 설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떄, 우리는 가장 치밀한 설명이 오히려 가장 어리둥절한 불가사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 자신보다 더욱 있을 법한 존재요,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말은 입 밖에 나왔을 떄 소멸한다. 신앙은 연인을 가까이 끌어당기는 침묵과도 같고, 바람 속에서 더불어 나누는 호흡과도 같다.

우리가 그분의 존재를 믿게끔 되는 것은 논리적 전제들로부터 추론된 결론 때문도 아니고 어떤 느낌에서 오는 결과도 아니다.

 

다른 문제들을 다룰 때는 결단하기 전에 먼저 의심하지만 하나님에 관해서는 말보다 먼저 노래를 한다. 그분을 찬양할 줄 모르고서는 구분을 아는 법을 깨우칠 수가 없다. 찬양은 우리가 경이에 대하여 내놓는 첫 번째 대답이다.

 

무감동은 무심결에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바뀐다.

그분은 하나의 존재(a being)가 아니라 모든 존재들 속에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존재(being in and beyond all beings)다.

곧 존재하는 모든 것 이상이신 분, 표현 불가능한 것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분, 우리의 머리로는 대답 못할 질문을 하시는 분, 우리의 삶으로써 겨우 하나의 대답을 해드릴 수 있는 그런 분!

하나의 영감은 지나간다. 그러나 영감을 받음은 지나가지 않는다.

 

10. 의심

정직한 마음에는 의심의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표현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감각은 의심보다 먼저요 더 강하다.

논증이란 수호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어떤 확신을 앞서 주장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잘 아는 상태로 옮겨가는 그 결정적 단계는 삼단논법으로 구멍 난 계단을 건너뛰는 것이 아니라 제 자리로 후퇴하는 것이다. 어떤 전제를 덧보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전제들을 포기하는 것, 자의식의 뒤로 돌아가 자아와 스스로 알고 있노라고 허세 부리던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11. 신앙

한 알의 씨앗이 나무로 바뀌는 것은 땅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요, 신앙이 그 터를 잡는 곳은 모든 이성을 넘어서는 자리다.

우리는 신앙 행위를 신앙의 표현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기술,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의 임재를 느껴 아는 기술은 그렇게 즉석에서 터득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의 단음(스타카토)처럼 울린다. 그 단절된 음조인 듯 울리는 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이는 사람만이 곡의 주제를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은 혼자 있기를 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은 그분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을 언제까지나 모르는 척 할 수가 없다.

신앙은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수줍음으로 발갛게 물드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너무나도 두텁게 정신적인 화장을 하고 있다. 자신의 얼굴을 거의 상실한 지경에 이르러 있다.

하나님을 하나의 취미삼아, 임시 고용된 일자리처럼 생각하면 문제를 바로 세우는 일조차 할 수가 없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앎은, 우리가 그분에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 그분은 가장 중요한 분이 아닌 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분이다. 그러기에 그분 없이 승리하는 것보다 그분과 함께 패배하는 것이 더 낫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나를 향한 그분의 보살핌이 나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분, 그분이 하나님이다.

 

12. 신성이란 말의 의미

인간은 자기가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남에게 넘겨 준다. 신앙심 깊은 사람은 그것을 남에게 넘겨주기보다 그것을 살기를 갈망한다.

가장 싱싱하게 살아 있는 말도 입 밖에 나오는 순간 죽어 버린다. 말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시작하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깨달음은 즉각적인데 우리의 해석은 산만하고 광범위하다.

전체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 그 전체의 모든 부분과 하나가 되는 것임을 아는 사람들은 인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개인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듯이 모든 개인을 대하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고 하나의 목표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변덕스럽게 자주 바뀌는 우리의 인생을 한결같게 잡아주시는 분이며, 우리의 경험으로는 그 빛깔과 관심사와 신조에서 - 인종, 계급, 민족들에서 - 각양각색인 것이 당신의 눈에는, 그리고 본질에서는 하나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이다.

 

13. 한 분 하나님

세계 도처에서 다신론은 거의 최면술적인 매력을 발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교도들의 의식을 그리워하게 한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일신론보다는 다신론을 품고 숭배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사실은 사실이다.

수면 위의 굴절되지 않은 빛줄기를 내다보는 것, 하나됨과 통일을 그리워하는 것은 성숙한 인간의 두드러진 모습이다.

하나됨은 사명이지 조건이 아니다.

우리 모두 지속하려는 간절한 뜻에 의하여 생명을 간직하고 있다. 지속한다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과 동의어는 하나뿐이다. "한 분"(One)이 그것이다.

 

야훼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야훼께서는 한 분이시다.

들어라, 그분은 한 분이시다.

하나는 독특함(unique)을 뜻한다.

하나님의 독특하심에 대하여 우리는 그분이 독특하시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모른다. 그분의 독특하심은 그분이 표현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그 분이 우주보다 크시다고 말하는 것은 영원이 하루보다 크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분은 우주를 넘어 그 위에 계신 실재다.

 

아주 많이 배운자가 사악할 수도 있고 일자 무식인 사람이 의로울 수도 있다.

선과 악은 마음의 질이 아니라 실재 속에서의 관계들이다. 악은 분할, 다툼, 일치의 결핍이고, 모든 존재의 하나됨이 사물의 다원성보다 우선하는 것과 같이 선이 악보다 우선한다.

그분은 모든 여기에 그리고 모든 저기에 게신다.

"사람이 제 아무리 숨어도 내 눈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똑똑히 들어라. 하늘과 땅 어디를 가나 내가 없는 곳은 없다. 똑똑히 들어라"(예레미야 23:24)

 

하나님은 저 너머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계시며, 나의 생각뿐만 아니라 나의 몸에도 가까이 계신다.

"우상은 가깝고 멀다. 하나님은 멀고 가깝다."

"하나님은 멀다. 그러가 그분보다 더 가까운 것은 없다." 그분은 온갖 종류의 가까움으로 가까이 계시다.

 

하나님의 하나님(unity)은 하나님과 모든 사물을 하나이게 하는 힘이다.

하나님의 하나이심은 이 세상의 하나됨을 위한 간절한 관심이다.

 

14. 하나님이 주체다

창조적인 통찰은 계산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들이 자기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는 것을 경험할 때, 그 경험 속에서 하나의 반응으로 일어난다.

세계는 있고 그리고 생각의 대상이 된다. 영원은 하나님의 추억이다. 세계는 우리 앞에 서 있고 그 동안 하나님은 우리 뒤에서 걷는다.

우리는 우리 생각에 '나'인 것이 하나님께는 하나의 '그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을 이해하려다가 실패하는 까닭은 우리의 개념을 끝없이 넓게 펼칠줄을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충분히 닫을 줄을 몰라서다.

종교는 경험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성경은 인간의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간학이다.

우리에게는 그분의 크심을 다 표현할 만한 언어가 없고 또 그분을 우리의 마음에 설명해 줄 개념도 없다.

실재(reality)

그분에 대한 우리의 앎속에는, 그분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확신과 함께 다른 것이 더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하나님 믿음이 하나님이다.(Our trust in God is God)

 

표현 불가능한 것의 무한한 우월성을 단 한번이라도 감지한 적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낮을 수 없는 분이며, 선을 이루려는 힘조차 만일 그것이 하나님꼐 없다면 우리가 소유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우리 안에 도덕성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안에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해란 동의와 같은 말이다. 동의를 통하여 우리는 이해의 길을 찾아나간다.

 

15. 하나님의 관심

생명의 본질은 강렬한 관심과 보살핌이다.

생명은 관계다.

어린아이는 사물들과 타인들이 포함되어 있는 환경을 발견함으로써가 아니라 타인의 관심을 알아보게 됨으로써 사람이 된다.

남들에 대한 관심은 흔히 자기부정이라는 대가를 요구한다.

남들에 대한 관심은 폭의 확장이 아니라 상승이다. 올라가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유익을 뛰어넘어 성장할 때, 남들에게 유익한 것이 자기에게도 중요한 것이 될 떄, 새로운 수직적 차원에, 거축함의 차원에 이른다.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은밀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억누름은 그를 지으신 이를 모욕함이요. 없는 사람을 동정함은 그를 지으신 이를 높임이다.(잠언 14:31)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 속에는 자신에 대한 돌봄을 의무로서 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섬긴다 함은 항복이 아니라 더불어 나눔을 뜻한다.

 

성실함은 자유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구체적 상황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하는 관심이었다.

우주 속의 하나님은 생명에 관심을 기울이는 하나의 영이다. 우리에게는 하나의 사물인 것이 하나님께는 하나의 관심이다.

존재하는 것은 나타냄이다.(To be is to stand for). 신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속적인 나타냄 속에 현존하신다.

 

우리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What He is)는 알 수 없지만, 그분이 어디 계신지(Where He is)는 안다.

모든 영혼이 그분의 현존을 더불어 나누고 동시에 그분의 무서운  부재에서 오는 불안을 느낄 수가 있다.

우리의 양심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은 담벼락과도 같은 이 무감각을 그냥 두고 무엇을 희망할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질흙으로 빚어 만드실 때 나의 몸이 감당 못할 만큼 큰 연민(compassion)으로 숨을 불어넣지 않으셨다면, 이 요란스런 도시의 불빛과 별들의 빛이 있다 해도 나에게 세계는 어둠일 뿐이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나의 몸은 나에게 어둠일 뿐이요 그 불안과 비참을 누가 견뎌낼 수 있겠는가?

 

16. 숨으시는 하나님

우리는 아담이 그랬듯이, 자신의 범죄를 시인하는 대신 오히려 다른 누군가에게 탓을 돌리려고 한다.

하나님은 침묵하시지 않는다.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숨은 것이 더 중대한 문제였다. "너는 어디 있느냐?"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물음이다. 인간의 부재 증명, 이것이 우리의 문제다. 숨은 자, 도망친 자, 알리바이를 가진 자는 인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러게 까마득히 먼 분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을 간절히 바랄 때 그분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사라진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숨으시는 장소다.

하나님꼐서도 '내가 숨어 있는데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구나'하고 말씀하신다.

 

17. 신앙을 넘어서

신앙을 갖지 않는 것은 목석이 되는 것이며, 분별 없는 신앙을 갖는 것은 미신 행위다.

개인적인 신앙은 스스로 충분치 못하다.

셰마가 하는 일이란, "들어라, 이스라엘아!"하고 외치는 그분의 음성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기억이야말로 모든 행동의 시금석이다.

기억은 신앙의 근원이다. 신앙한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현재를 거룩하게 만든다.

우리 모두가 적어도 한번쯤은 하나님의 순간적인 실재를 경험한다.

그런 경험들을 기억하고 그 순간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것이 신앙을 지탱시켜 주는 힘이다. 이런 뜻에서, 신앙은 성실함이다.(faith is faithfulness). 한 사건에 대하여 충실함이요 우리의 응답에 충실함이다.

신앙은 하나의 관념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동의하는 것이다.

믿음은 인격적인 확신이다.

 

신앙이 없는 믿음이란 하나의 형식적인 행위일 뿐이다. 그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계산기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빈약한 행위다.

신조들은 변하고 발전하고 시들어서 이울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본체(내용)는 어느 시대에나 동일하다.

진리는 이성을 두려워할 아무 까닭이 없다.

이성 없는 신앙은 벙어리요 신앙 없는 이성은 귀머거리다.

성실함을 얻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 밑바닥에는, 우리 안에 있는 표현 불가능한 것이 우리를 넘어서 있는 표현 불가능한 것과 교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깔려 있다.

 

 

제2부 삶의 문제

18. 요구의 문제

"모르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으르 바란다.

인생이란 요구들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많이 배웠으면서 사악할 수 있고, 윤리학에 권위자면서 더럽게 살 수 있으며, 분노를 잠재우는 방법을 잘 알면서도 화를 삭이지 못하는 수가 있다.

우리는 거의 너무 늦은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하나의 행동과 선언이 옳고 그른 것은 그것이 유익하냐 불리하냐와 상관이 없다.

시기에 적절한 것이 참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절박한 요구를 채우고자 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다.

옳음은 이해관계의 울타리 밖에 있다.

우상화된 요구들을 깨어 부수고 우리의 부도덕한 관심들을, 비록 그것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면서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더라도, 거절하기 위하여 우리는 더욱 높은 '예(yes)'의 이름으로,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아니다(no)'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19. 실존의 의미

자의식을 갖게 되면서부터 그는 "내가 있다"(I am)는 것을 아는데서 그치지 아니하고, 자기가 "무엇인지"(what he is)를 알고자 한다.

요구할 뿐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요구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요구받고 있는가?(Am I needed)

자기를 저장해 두는 것은 인생을 더욱 공허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말 피하는 유일한 길은 목적이 아니라 남의 요구가 되는 것(to be a need)이다. 행복이란 사실상 자신이 남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확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겠다.

역사가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일어나는 것과 같이, 인류는 개인에게서 비롯된다.

모두에게 좋은 것이 한 사람에게 좋은 것보다 나은 게 사실이지만, 인류에게 의미를 주는 것은 구체적인 개인이다.

 

무엇인가 목숨과 고뇌와 갈등을 넘어 그것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 것을 알고자 목말라하지 않는 영혼은 없다.

실존이 시간과 맺는 관계가 공간과 맺는 관계보다 더욱 긴밀하고 독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참으로 소유하는 유일한 소유물이다.

그러나 시간은 가장 얇은 것이다. 사라지는 순간들의 연속일 뿐, 그것은 우리가 잡을 수 없는 무엇이다.

 

실존은 욕구가 아니라 하나의 순종이며, 추진이 아니라 동의다. 존재함으로 우리는 순종한다.(In being we obey)

무엇인가 해야만 하니까, 비로소 그 다음에, 하려는 의지를 품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밖에 없지만 그것을 오해하는 길은 여럿이 있다. 목표는 하나밖에 없지만 그 목표에서 벗어나는 길은 여럿이 있다.

시간은 두 가지 관점에서, 즉 일시성의 관점과 영원의 관점에서 볼 수가 있다.

시간은 영원의 경계선이다.

 

우리가 사귀고 예배하고 사랑할 수 있음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다. 하루가 천 년 만큼 값질 수 있는 것도 시간 속에서다.

창조적인 깨달음은 한평생을 한 순간처럼 살게 한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은 영원히 계속된다. 영속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통하는 것 "그 분에게 달라붙는 것"(신명기 11:22)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함꼐 있는 것(being together)으로서, 인간의 영혼이 처해 있는 상태일 뿐 아니라 실존의 한 양태다.

 

20. 인간의 본질

모든 길에는 우리가 저질러 놓은 실패들이 섬광등처럼 번쩍이고 옳은 것은 지하에 숨어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을 분출신키는 존재면서 동시에 유기적 자연의 한 부분이다.

인간은 동물과 영 사이에 설치된 아슬아슬한 무대다. 그의 무대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솟구쳐 오르거나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그런 무대다.

 

인간은 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의미는 아니다.

자아는 하나의 요구다. 그러나 자신의 요구는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남는 것은 정열도 기쁨도 즐거움도 아픔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다른 모든 요구들과 달리, 요구받으려는 요구는 스스로 충족하려고 하는 노력이 아니라, 충족시켜 주려고 하는 노력이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홀로 실존의 참된 의미가 주는 데서, 내놓는 데서, 사람을 사람으로 마주 대하는 데서,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채워 주는 데서, 체험된다는 사실을 안다.

있는 것은 다만 하나의 질문, 사람에게 묻는 하나님의 질문뿐이다. 너는 어디 있느냐?

종교적인 삶이란 우리를 필요로 하는 목적에 봉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이 우주의 드라마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관객이 아니다.

우리 속에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신성과의 혈연관계가 맺어져 있다. 인간의 영혼은 자연의 인화성 자질에 의해 발화된 화톳불이 아니라, 이 우주의 길을 밝히는 하나님의 촛불이다. 그리고 모든 영혼은 저마다 그분께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다. 인간은 요구되고 있다. 하나님이 그를 필요로 하신다.

 

21. 목적의 문제

눈앞에 목표를 세우는 것, 그것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문명한 삶으로 가는 길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인은 요구를 따르는 데 눈이 멀지 않는 사람이다. 그 대신 그는 요구들의 상대적인 값어치들을 달아보고 비교하여, 더 높은 가치를 끌어올리고 풍요하게 하는 요구들을 채우려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좋은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요구들만 인정하려 할 것이다.

눈앞에 목표를 세우는 것, 그것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문명한 삶으로 가는 길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인은 요구를 따르는 데 눈이 멀지 않는 사람이다. 그 대신 그는 요구들의 상대적인 값어치들을 달아보고 비교하여, 더 높은 가치를 끌어올리고 풍요하게 하는 요구들을 채우려 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좋은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요구들만 인정하려 할 것이다.

"목적이 요구를 정당화 한다."

 

우리의 사심은 의미를 재는 척도가 못된다.

하나님이 보살피시는 것은 선하다. 인간을 자신과 하나되게 하는 것,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선하다.

삶은 입체적이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서로 분별된다는 생각만은 언제나 어디서나 한결같다.

정의는 모든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무엇이다.

하나님의 소유권이 우리의 인생을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

성스러움의 실체는 그의 믿고자 하는 의지에 달려 있지 않다.

 

22. 종교란 무엇인가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분의 임재는 더욱 확실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다. 그분의 뜻과 충돌되는 우리의 이익을 포함하여 우리 안에서 그분을 대적하는 모든 것들과 싸우는 것이다.

늘 두려워하는 가운데 가야 하는 길이다.

하나의 새로운 질문은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거나 내다보는 것 이상이다.

무엇을 탐구하자면 우선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중간이 없다. 그분을 무시하는 것은 그분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그의 생명이 지속되는 동안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목적은 "정의를 행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너희 하나님과 더불어 겸손하게 걸어가는" 것이다.

모든 행위, 생각, 느낌, 사건이 그분의 관심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길은 없다.

 

신앙심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하나의 응답이다.

언어는 홍수를 막지 못하고 묵상은 폭풍우를 잠재우지 못한다. 기도는 결코 물리적인 원인과 결과의 사슬에 직접 감겨들지 않는다. 정신적인 것은 사물의 자연적 질서를 간섭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성실성을 지닌 사람이 그 영혼의 진수를 쏟아 기도한다는 사실은 기도라는 행위가 효력을 발생하는 영역이 있다는 확신, 그 안에서 정신이 중대한 결과를 이룩할 수 있는 어떤 질서가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모든 사건들이 그분 안에서 반사되고, 모든 실존이 하나님과 공존한다. 시간과 공간은 세상의 한계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여기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발생한다.

 

23. 유다 종교에 관한 하나의 정의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이 필요하다.

삶은 하나님과 인간의 협동경영(partnership)이다.

하나님은 정의, 평화, 성스러움을 위한 인간의 싸움에 동맹자로서 참전하신다.

그러나 진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분담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서 종교를 발생한다.

 

우리 모두 그분이 찾으시는 대상이다.

 

24. 위대한 동경

우리는 덧없는 욕망들을 품고 살아가는 데 익숙해 있다.

"두려워하라. 그리고 기도하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만족하되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는 결코 만족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행복. 자기가 요구받고 있다는 확신, 여전히 앞에 있는 목적을 내다보는 것, 바로 그것이 행복의 본질이다. 자기 만족이 허무와 절망을 낳는다.

자기 만족은 바닥 없는 심연의 가장자리다.

나른한 몰락의 길...

 

25. 생활방식

"사람은 모름지기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낼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다."(전도서 3:13)

인간은 자기 자신보다 더 훌륭해질 수 있는 능력을 하늘로부터 받고 태어났다.

"하나님은 인간을 바르게 만드셨다."

"거룩하신 분이 너희 가운데 계시다'(호세아 11:9)는 말도 있거니와, 사람은 자신을 그 몸 속에 거룩하신 이가 거하는 존재로 항상 대해야 한다. 따라서 자기와 몸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모든 주체들 중의 주체시다.

그분은 우리를 세상에 팽개치고 버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고생을 나누고 우리의 걱정을 분담하신다.

하나의 요구를 의식하게 될 때 사람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요구하시는가? 하나님을 우리와 함께 행동하시는 동역자(partner)로 모시는 것은, 우리의 문제들이 전적으로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26. 경건한 신앙인

경건은 마음의 기능이 아니고 영혼의 이상이다.

경건은 모든 성격 속에, 모든 행위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삶의 행로다.

경건한 신앙인은 세상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인생이 한 개인 혹은 한 민족의 생애, 한 세대 혹은 한 시대의 생애가 차지하는 폭을 능가하는 넓은 지평선 아래 자리를 잡고 있음을 깨달아 알고 있다.

사소한 사물들 속에서 그는 큰 뜻을 읽고, 단순하게 흔한 것들 속에서 궁극적인 것을 감지하며, 빠르게 지나치는 순간 속에서 영원의 고요함을 느낀다.

그러므로 경건은 하나의 생활방식이다. 그것은 인간의 내심이 성스러움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행위, 느낌, 생각들의 궁극적 가치에 대한 주된 관심이다. 경건한 신앙인은 어떤 영적 인력에 가슴을 열고 끌려감으로써 우주적인 고요함의 중심을 향해 움직이고 그의 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경건한 신앙인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바는 하나님의 관심에 대한 관심이다.

경건은 이기심의 정반대다.

경건의 힘은 머리의 총명함이 아니라 마음의 순수함에서 솟아난다.

경건은 삶의 문제다. 초월의 현실을 감지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을 향하여 바른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비전이며 믿음으로 가는 길일 뿐 아니라, 조정이며 부름에 대한 응답이요 생활방식이다.

 

반향하고 그 음성에 응답코자 한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그분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

하나님의 임재는 근접한 산이나 근접한 바다 같지는 않다.

성실한 부모의 굳은 살 박힌 손에서, 박해를 받으나 하나님 맏는 신앙을 지키는 자들의 멍든 얼굴과 못쓰게 된 몸뚱이에서, 그는 이 땅에 남은 최후의 위대한 빛을 볼 것이다.

경건한 삶이란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어떻게 쓸모 있는 존재인지, 어떤 목적에 그를 활용해야 할는지 알 수 없다 해도 그는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로 존중을 받아 마땅하다.

공경은 값지고 귀중한 어떤 것에 대한, 훌륭한 어떤 사람에 대한 특별한 태도다.

세상을 관통해 살피는 하나님을 온전히 가려버릴 가리개는 어디에도 없다.

 

자기가 받은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들어 있음을 알 때, 보통 사람은 인생에 대하여 기쁨과 우울함이라는 두 가지 태도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경건한 신앙인은 다만 기뻐할 따름이다.

우울은 내어줌이 아니라 거절함이요, 감사함이 아니라 푸대접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경건한 신앙인은 삶을 저절로 살아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일이 아무리 힘겨워도 그 때문에, 자신의 삶이 하나의 기적이며, 지금 자기가 하나님을 통하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는 않는다.

모든 사물 속에 감추어져 있는 선의 다스운 온기를 느끼고, 눈길이 닿는 모든 평범한 대상 속에서 하나님의 귀띔을 눈치 챈다.

 

책임은 자유를 암시한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진정으로 독립하고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다시 돌아 책임을 암시한다.

소유와 선물은 서로 다르다. 소유는 고독이다.

반면에 선물을 받음으로써 그 수령자는 선물 말고도 선물을 주는 자의 사랑까지 얻어 갖는다. 선물은 그러므로 애정을 담는 그릇이다.

경건한 신앙인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선물을 받고 있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오는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이다.

 

희생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포기하거나 인생이라는 선물을 내어던지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그분의 일을 위해 씀으로써 그분꼐 돌려드리는 것이다. 그 돌려드림이 바로 감사함이다.

 

단순한 궁핍 그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니다. 궁핍의 쓰라림이 인간의 성품을 뒤틀리게 만들기가 쉽기 때문이다. 반면에 올바로 된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기뻐 받음으로써 그것으로 남을 섬기는 능력과 남에게 내어주는 수단을 삼는다. 자기희생의 목적은 그냥 자신을 빈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을 동경하여 자신의 품속에 그분이 계실 자리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나님을 본받음이다.

경건한 신앙인에게 이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길을 가는 힘찬 발걸음이다.

 

결국, 경건이란 하나님의 뜻에 충절을 바치는 것이다.

인생은 연금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위임이다. 놀이가 아니라 사명이다. 호의로 받은 선물이 아니라 명령이다.

행동하기 전에 그 행동이 미칠 영향의 무게를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본다. 그는 말하기 전에 자신의 말이 과연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릴 것인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한다.

그에게는 길이 목적지보다 더 중요하다.

 

하나의 피조물을 도움으로써 그는 창조주를 돕는 것이다. 가난한 자를 붙들어 줌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사업을 완성한다.

선을 향해 자기를 바치는 인생의 영광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보물이 된다.

자유와 섬김, 지나가는 것과 영원한 것을 조화시키는 일, 그리고 시간이라는 명주실로 영원이라는  비단을 짜는 일,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 지니고 있는 의미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지혜는 그분을 도와드리고 섬기는 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깨달아 아는 데 있다.

신에게 자신을 궁극적으로 바치는 것, 이것이 죽음의 의미다.

자기를 신에게 바치는 이 행위는 하나님이 생명을 선물로 주심에 대한 인간 쪽의 마땅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경건한 신앙인에게는 죽는 것이 하나의 특전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