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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분투다 (김선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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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분투다 (김선교)

sori4rang_ 2016.01.28 12:42

 

 

강추하는 책 [믿음은 분투다]

터널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보게된 책 저자의 인터뷰,

모태신앙으로 살아온 나에게 뭔가 돌파구 되어줄 수도 있겠다는 실낙같은 희망으로 바로 책을 주문했다.

그리고 컴컴한 터널 안에서 이 책을 붙들고 주님의 마음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20대의 고백이라고 하기에는 몹시 진중하고 깊이가 있는 책이다.

두고 두고 밑줄을 다시 그어보게 될 것 같은 책.

이 책을 만나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디모데전서 6:12)

 

프롤로그

순종의 한 걸음을 떼다

난 그저 처해진 상황을 견뎠을 뿐인데 주님은 그곳에서 나를 다듬고 연단해주셨다.

이 길 끝에 주님이 계실 것이라는 확신!

한 걸음으로 인한 결과, 즉 무엇을 이루어내고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걷는 그 걸음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

 

THE PURSUIT OF FAITH . 내 믿음 여행의 시작 1PART

01. 나의 이야기

'나는 안 돼'라는 사실에 너무 큰 '아멘'을 해버려서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 점점 듣고 배웠던 진리와 말씀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진리와 멀어진다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과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기도할 때에도 내가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결단하기 보다는 저절로 열정이 생기고 의지가 생기길 기도했다.

믿음을 써야 하고 선택해야 하는 자리로 자꾸 나를 몰아가셨다.

 

'네가 받은 은혜를 세어보아라'

'네 믿음을 보이라'

내가 알든 모르든 주님은 항상 내게 말씀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무엇보다 주님은 인도하시는 내내 내게 답을 알려주고 계셨다.

 

내가 안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불가능한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었고 내주하시는 성령이 계신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바라봐야 할 대상을 바라보지 않고 자꾸 안 되는 나에게 시선이 머물러 있으니 답이 눈앞에 있는데도 보지 못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나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삶은 결코 절망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

'나는 죽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붙들어야만 하는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은 성령님듸 도우심과 이미 이루어놓으신 완벽한 조치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고 성령 하나님께 내 삶을 내어드리는 의지적인 노력이 있어야 함을 알게 하시며 결단하는 시간을 갖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그 완전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마음이 나를 향해 있으시다는 것이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하나님의 마음이 나를 향해 있으시고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4)

 

내 연약함이 발견되면 될수록 더욱 주님을 바라볼 이유가 될 뿐이다.

내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한 대책을 가지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나아가야 내 삶에 답이 있음을!

그냥 아는만큼 또 알려주시는 만큼 믿음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주님을 경험하면 되는 것이었다.

가장 치열한 믿음의 자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가장 깊이 경험할 수 있는 자리이기에 계속 도전하며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믿음의 자리인지 반드시 진리의 잣대로 확인해 보아야 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완전한 복음을 마음껏 누리기를 원하신다.

넘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뛰어넘어 완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고 주님을 의지하며 기대하자.

 

02. 믿음 여행의 준비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복음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은 매사에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영적 무감각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장 시급한 일로 여겨야 한다.

우선 필요한 것은 영적 무감각의 위험성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데는 둔감하기 짝이 없다.

"성령님, 제가 제 잘못을 온전히 깨닫도록 저를 철저히 살펴서 말씀해주소서"라고 기도하면 된다.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아는 것이다.

'완전한 복음을 들었는데 왜 내 삶은 그대로인가? 왜 변하지 않는가? 왜 실제가 되지 않는가?'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4:2)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말씀을 믿지 않아서라는 것이다.

승리가 모든 싸움의 목적이다.

승리하기 위해 믿음의 싸움을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범하는 오류이다. 예수님께서 2000여 년 전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싸웠어야 하고 앞으로 싸워야 할 모든 싸움을 승리로 끝을 맺으신 완료형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이미 승리가 보장되었다.

모든 상황속에서도 승리를 보장해 놓고 떠나신 것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승패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놓으신 승리를 누리기 위한 싸움이다.

우리가 싸울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며, 이 싸움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승리를 누리는 것이다.

초점이 빗나간 싸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과 동떨어진 자리에 서게 한다. 초점을 바로 잡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어긋나고 결론이 나지 않는 싸움을 계속 하게 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수많은 질문들이 '나'에게 맞추어져 있을 떄 완전히 초점을 잃고 만다.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우리가 복음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그런데 우리의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다. 즉, 믿음의 '근거'이다. 믿음은 반드시 믿음의 대상, 믿음의 근거가 전제되어야 한다.

믿음은 어렵거나 힘들고 의지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은 믿음 없이는 하루, 한 시간, 일 분, 일 초도 살 수가 없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

믿음이 가면 기꺼이 그 자리를 선택하여 그곳에 머문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을 믿음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나 오력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 대상이다.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올바른 대상을 향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믿음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데, 이것은 반드시 '은혜'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 은혜 없이 우리의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이루어놓은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고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 또한 변함없다.

 

정신 차리고 똑똑히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상황과 환경 위에 두시고 다스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우리는 상황과 환경에 침몰당할 존재가 아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상호아에서도 그것을 다스리고 뛰어넘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 다만 우리의 태도, 우리의 잘못된 초점이 문제이다.

나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도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안 되기에 우리는 주님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상태에 따라 하나님을 멋대로 판단하고 결론짓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믿음의 대상보다 자신의 믿음의 상태에 더욱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에서 더 멀리 가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야하지?'에서 '나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옮겨야 한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사셨는가?' 곧장 말씀으로 우리의 초점을 옮겨져야만 한다.

우리의 믿음의 유무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여러 가지 이유와 근거를 들이대면서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믿어버린다. 이런 자기확신의 결과는 생명의 열매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공급받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가능하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 7:21)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믿을 수밖에 없어서, 믿어지기에 믿는 것이다. 내가 애쓰고 노력하는 게 아니다.

의지 자체가 믿음은 아니다. 온전한 믿음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놓으셨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었으니"(고전 1:30)

 

과거 완료형.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고,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셨으며, 구속함이 되셨다. 이것은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이루어진 일을 누리라고 주신 것이 믿음인데 자꾸 내가 이루려고 애쓰다 보니 힘들고 지치고 고단한 것이다.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믿음이 만족스러운가?"

 

열매를 보아서 그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 있다고 하셨다. 당신의 삶 속에서 맺은 열매는 좋은 열매인가, 나쁜 열매인가? 당신의 믿음이 만족스럽다고 대답했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열매를 맺고 있어야 한다.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다!' 선의 절대적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즉, 선이신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않는 것은 다 죄라는 것이다.

내가 맺고 있는 열매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럼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 30:30)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을 때뿐이다.

혹시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면서 '구원만 얻으내고 싶은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나의 믿음의 정확한 진단 없이 구원의 확신만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해주셨다.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열쇠인 것은 맞지만, 구원을 얻기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에 대한 바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성경은 분명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살아가시지 않았는가?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 계신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8)

 

말씀이 이 땅 가운데서 실제임을 증명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이 말은 우리도 동일하게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영적인 영역과 현실을 분리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살아낼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일을 시키셨겠는가?

사실 하나님 자체가 해답이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성경의 모든 일은 지금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실제임을 기억하라.

세상을 알려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세상이 진짜 세상이며 진짜 세상을 알아야 제대로 이 세상을 섬길 수 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보다 세상을 잘 아시는 분은 없다.

세상에 속한 자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를 구분하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이다.

이신칭의 -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핵심적인 진리이다.

 

주님은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믿은 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단호하게 선언하신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믿음이 좋다'고 말하는 기준인 눈으로 보이는 행위(교회 봉사, 직분, 선행 등)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다를 수도 있다. 섬기는 행위 자체를 믿음이라고 보기에는 무언가 굉장히 허술하다는 것이다.

혹 당신은 믿음을 하나님의 진리의 잣대로 점검하기보다 사람의 평가와 인정에 자신의 믿음의 유무를 맡기고 있지는 않은가?

믿음이 있고 없고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믿음은 쓸모가 없다.

우리 믿음은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진리)의 잣대 앞에 서서 하나님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떄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4:5)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우리가 믿음으로 이겨야 할 세상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어둠의 세력과 세상 주관자들이다. 이들을 상대하도록 무기로 주신 것이 믿음인데 그 무기를 정확하게 사용할 줄을 모르니 그 공격 앞에 무력한 것이다.

왜 이 믿음은 내게 능력이 되지 않고 무기력한가.

바로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어떤 믿음 위에 내가 서 있는지 점검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구속의 역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하고 완벽하게 이루어내셨다. 그렇다면 그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너의 믿음은 정확하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말씀대로 주님은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소원하는 자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눈을 여시고 귀를 여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듣게 하심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고 싶으셨던 그분의 우리를 향한 열정이 우리를 십자가의 완전한 복음을 누리는 온전한 믿음 가운데로 이끌어가실 것이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주고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롬 1:11)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라 결론을 분명하게 찍고 시작한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선물)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이다.

믿음 자체가 나의 의지나 노력이 아닌 올바르고 정확한 복음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믿는 대상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믿음 역시 정확하지 못할 뿐더러 그 믿음은 나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3, 14)

 

믿음의 시작은 들음이다. 들어야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한다.

로마서 10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고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리이다. 우리가 성경을 펼치는 행위는 내가 스스로 성경을 깊이 파헤쳐서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의지와 간절함이 들려주시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과 만나서 그분의 음성을 들음으로 우리는 그분을 더욱 깊이 알게 되는 것이다.

 

삶과 동떨어진 신학이론과 지식은 우리를 십자가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남을 판단하는 행위는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판단하는 그 자신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며 자신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고만이기 때문이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롬 2:18-20)

 

그런 자들이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이미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광대하신 뜻을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우리는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다만 믿을 뿐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에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지식과 경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면 기꺼이 쓰레기처럼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은 쳐다보지 않겠다는 사도 바울의 확고한 태도인 것이다.

먼저는 나의 선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기로 결정해야 한다.

먼저 우리의 존재의 실상을 기억해야 한다.

 

나느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말씀 앞에 설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바로 겸손이다.

성경에서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을 겸손이라고 말했다. 겸손은 한 마디로 낮아짐이다.

"피조물에게 겸손은 영광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피조물과 같이 되시는 가장 천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내려갈 곳도 낮아질 것도 없다. 우리가 가장 천하고 낮기 때문이다.

피조물에게 겸손이란, 더 낮아질 것도 없을 만큼 천하고 연약하며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 없이는 한순간도 살수 없는 은혜 입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높은 자리나 직분, 직위가 우리의 존재를 높여줄 수 없다. 우리는 그저 긍휼과 은혜가 필요한 피조물일뿐이다.

사실 우리는 '내가 좀 낮아져야지, 겸손해 져야지'라고 결심할 필요조차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면 된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높아지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낮은 자를 높이시는 은혜다. 그래서 피조물에게 겸손은 영광인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자신을 완전히 부인해야만 가능하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내 감정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사실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인정하든 안 하든 내가 죄인이며 죽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내 육체가 반응하는 왜곡된 감정의 반응을 부인하고 진리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를 충족시키시면서 부지중에 살인한 자, 즉 아담의 후손으로 죄의 생명을 지니고 태어난 우리에게 살길을 열어놓으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내가 '이미 안다'라고 하는 고만과 스스로의 잘못된 확신을 깨뜨려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인정하는 겸손함에서 비롯된다. 나의 실상을 인정하고, 진리와 상관없이 반응할 수 있는 모든 느낌과 감정의 동요를 부인하며, 진리를 받아드리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말씀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바르게 진단받을 수 있다.

말씀 앞에 바로 서고자 하는 믿음은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가 아닌 죽음의 자리, 곧 십자가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십자가를 멀리 둔 채 명확하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앞으로 가까이 가야 한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로 더욱 가까이 이끌어주실 것이다.

1분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유한한 인간인 우리는 지금 십자가 앞에 서 있어야만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십자가를 지게 하기 위해셔였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보내신 것은 죽음이 결론이 아니었다. 죽음을 통하여 살리시기 위함이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 40)

 

그 영광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로 기꺼이 나가셨다. 우리 역시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이 있을 수 있따. 그러나 그 죽음이 결론이 아니다. 반드시 그 죽음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서 일으키셨던 것처럼 이 복음을 누리는 믿음을 가진 새 생명으로 일으키실 것이다.

죄 된 생명의 죽음 없이 아들의 부활생명은 없다. 죽어야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살리는 죽음의 십자가로 우리를 보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 가운데서 일으키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온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정해주실 것이다. 아픔도 있고 어려움도 있을 수 있지만 온몸에 힘을 빼고 그분께 나를 맡겨야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7)

 

 

THE PURSUIT OF FAITH . 온전한 믿음을 찾는 여저 2PART

03. 믿음에서 믿음으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우리는 믿음에서 소망으로 가고, 소망에서 사랑까지 갔다가 다시 유턴하여 사랑에서 소망 그리고 믿음에 이르는 여행을 할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복음은 우리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한다. 시작이 믿음이고 끝도 믿음이라는 말도 안되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할 것이라 말도 된다.

내가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주님을 바라고 소망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소망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자리에 서 있음을 보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해놓으시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살아갈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미리 조정하셨따. 또한 인간이 하나님과 사랑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 즉 인격적이며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하나님께서 지으신 동산에서 마음껏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하려면 자발적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했다.

'실재'란 사실을 나타내며, 현실에서 존재함을 의미를 지닌 것으로 그 존재에 초점이 있다. 반면 '실제'는 사실의 경우나 형편을 의미하는 말로 사실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하거나 본인이 보고 듣는 경험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직접 하거나 느끼는 것을 말한다.

존재하는 실재를 여러 가지 감각적인 기관과 기능을 통하여 경험하여 실제가 되는 것이다.

'실재'(허상이 아님)는 우리가 경험하여 알기만 하면 반드시 '실제'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다. 그리고 이 실재이신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실제로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셨다. 그러려면 반드시 인간 편에서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 기능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감정이다.

 

"실재 = 실제"

"감정 + 실재 = 실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을 통들어 우리는 '자유의지'(선택할 수도 있고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권한)라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위험한 것은 자유의지가 포함하고 있는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기능인 감정이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은 앞서 잠깐 다뤘지만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위하여 주신 선무이다. 그러나 감정은 무조건 옳은 것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옳지 않더라도 좋아 보이는 것에도 반응할 수 있다.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스럽다, 보기 좋다, 탐스럽다'라는 감정을 느꼈다.

이만큼 감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지만 잘못 다루면 위험한 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감정을 주시며 이 위험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안전장치도 함께 주셨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자유의지'이다.

따라서 자유의지란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도 있고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권한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다면 내 감정의 느낌(눈에 좋게 보이고 내 귀에 좋게 들리는)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 즉 위험천만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안전장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감정을 인격적으로 표현하는 것들이 많다. '불쌍히 여긴다. 분노하신다. 슬퍼하신다. 기뻐하신다. 좋아하신다. 즐거워하신다. 아파하신다.'

분명 감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감정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설명할 유일한 방법이다.

감정은 감각 기능을 통하여 인식할 때 형성된다.

감정에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감각이다.

먼저는 감각(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이 인격을 만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의지를 존중하시고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그 영역을 손대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다.

감정은 의지의 동의 없이 선택이라는 결과까지 이르지 못한다. 감정의 기준은 '진리, 비진리'가 아니라 '내가 느끼기에 좋다. 나쁘다'가 기준이다.

항상 감정이 원하는 것을 하려 할 때는 의지의 동의를 구한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실 때 쓰실 만큼 가장 완전한 속성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표현하듯이 사랑은 하나남의 성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속성이다. 사랑은 내가 느끼기에  좋은 것고 ㅏ나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진리(옳은 것, 변치 않는, 절대적인)를 선택한다.

오직 이 사랑이라는 열쇠로만 의지를 열 수 있고 그 의지가 몸을 움직여 옳은 것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에 죄를 가까이 하실 수도 없으시고 죄에 대하여 진도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며 진도하시는 죄 자체인 죄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감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고 우리를 향하여 진노하시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라는 것은 '하나님의 결정된 의지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는 것은 '그 의지를 움직여 아들을 보내는 결정을 하시게 한 원인'이다.

우리의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이셨다.

 

선악과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장치였다. 즉, 늘 탐스러운 선악과를 보면서도 사랑하는 주님이 먹지 말라고 한 명령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고 확증할 수 있는 약속의 증표였다. 그리고 '죽는다'는 말은 "먹으면 죽일 거야"라는 협박이 아니다. 인간이 먹는다는 결론을 내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끝이라는 의미였다.

당신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하는 수없는 노력과 최선보다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주님을 더 기쁘게 해드린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는가.

사탄은 모든 것의 핵심인 사랑의 대상을 바꾸려는 공격을 가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전에는 감정은 아무리 좋아 보여도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기에 마음대로 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것에 반응하도록 열어버린 것이다. 감정은 이제 내가 보기에, 듣기에, 만지기에 좋은 모든 것을 그대로 행할 수 있는 존재적인 죄인이 된 것이다.

인간의 목적은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였다.

죄를 끔찍하게도 싫어하시는 하나님앞에서 인간은 존재적 죄인이 되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능으로 주신 감정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미워할 수도 없고, 더럽게 느낄 수조차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죄를 좋아하고 즐거워하게 되었다. 더 이상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었고 실재하는 하나님을 실제로 누릴 수도 없게 되었다. 말 그대로 끝이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마냥 내버려두듯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대한 계획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은 그분의 완전한 계획 안에 있음을 잊지 말자. 그리고 그분의 완전하신 계획을 이해하려 하지 말고 신뢰하자.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기능으로는 하나님을 실제로 누릴 수 없다.

믿음은 단순하다. 절대 복잡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고 회복하시기 위해 주신 것이 믿음이므로, 어렵고 복잡하고 애매하게 만들어 우리를 헷갈리게 만들 이유가 없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만든다. 믿음은 육체를 입고 이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알아가고 교제하며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도구이자 하나님의 대책이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간이 살아가고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는 기능을 주신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완성하고 그 영광과 능력과 축복을 이 땅에서 누리게 하는 기능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이다.

 

"믿음 + 실재 = 실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누릴 수 있을까?

가능하다. 하나님꼐서 우리에게 살길을 보이셨다.

믿음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것(복음)을 이땅에서 누리는 것이 목적이지, 인간이 자신의 노력과 최선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러 구원을 얻고자 하는 몸부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이라는 천국 입장권을 가지고 우리와 거래하시는 쪼잔한 분이 아니시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제물로 삼으시고, 그 아들된 자격을 이 땅에서 누리라고 믿음이라는 도구를 주신 것이다.

구원에 대한 올바른 접근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복음을 완성하신 사건으로 가야 한다. 바로 십자가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십자가라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죽음이 우리를 죽음이라고 하는 진리에 믿음으로 화합해야 한다.

 

그분의 부활하신 생명에 참여하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진정 믿음으로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자만이 부활한 생명, 즉 구원을 얻은 하늘의 백성이 된다.

누려야 할 진리는 바로 삼위 하나님 안에 거하는, 즉 아들의 생명으로써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연합과 그 교제 안에 참여하는 진리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4.15)

 

구원은 이 믿음의 목적(아들의 생명으로써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향해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지 목적 자체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죄 된 존재를 끝내고 자녀 된 생명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나아가는 과정이 구원이다.

 

믿음의 주체가 나로부터가 아닌 믿는 대상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감정은 옳은 것에 반응하지 않고 내게 좋은 것에만 반응한다. 즉, 실채가 아닌 허상에도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나의 감정에 의존되어 있다면 얼마나 위험한가?

믿음은 그냥 존재한다.

'믿음의 있다 혹은 없다' 둘 중 하낟. 믿음은 무엇을 했기에 강하고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이 요동치는 것은 내가 느끼는 감정이 믿음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감정에 믿음의 전부를 걸 수 없다.

우리는 불안한 나 자신이 아닌 가장 확실한 믿음의 근거이신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의 복음에 믿음의 근거를 두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 위험한 관계, 감정에서부터 우리의 믿음을 떼어내는 결단을 해야만 한다. 사탄은 당신의 감정이란 영역을 제일 먼저 공격할 것인데 감정과 믿음이 떼어져 있다면 내 감정은 흔들리고 기복이 생겨도 나의 믿음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서도록 도울 것이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예수님을 따를 때에는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 내가 나라고 느끼는 감정적인 반응을 부인하고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룬어 놓으신 진리(십자가)를 붙들고 따르라 하셨다. '진리를 붙들고 따르라'는 말 속에는 실제로 십자가를 지는 듯한 고통과 아픔이 있을 수 있음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자신의 느낌, 곧 옛 자아의 반응,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부인하고 진리를 선택하는 믿음을 가진 자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

 

믿음의 삶은 치열한 싸움이다.

혹시 우리에게 일어나는 소욕들인 느낌과 정서 자체와 싸우진 않았는가? 옳은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저 내가 좋은 것에만 반응해버리는 무질서한 우리의 감정과 싸우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보자.

옳지 못한 감정, 소욕, 욕구와 백날 싸워봐도 단언컨대 절대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감정 자체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거짓에 노출되어 있는 나의 느낌이나 감정이라는 수도꼭지를 꽉 잠궈버리자! 물이 흐르는 수도를 쉴 새 없이 닦는 일은 무의하다. 그냥 수도를 꽉 잠궈버리면 될 일이다.

믿음은 감정과 비례하지 않는다.

믿음은 믿는 대상을 알아가는 것과 비례한다. 믿는 대상을 알아가는 것만큼 믿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기능인 믿음은 반드시 감정으로 느기는 것과 상관없이 실재만을 믿어야 한다. 즉, 믿음의 대상이 실재여야만 한다.

믿는 대상이 확실해야 우리의 믿음이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무한한 전능자이시며 실재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만큼 알 수 있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맏으리라 내가 세게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믿는 대상이신 하나님을 알아갈 때에는 그분이 알려주시고 보여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우리의 믿음은 늘 상식과 경험을 넘어선다.

자신의 상식과 경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지만, 마리아는 믿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눅 1:38)

 

성경의 믿음의 조상들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늘 그들에게 상식과 이해를 뛰어넘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알려주셨고 그러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믿음은 늘 상식과 경험을 뛰어넘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해와 상식 속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우리를 무한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자리로 이끌어가시며 우리의 믿음의 영역을 넓혀가신다.

당신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싶고 당신의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기를 소망한다면 당신이 알고 있는 상식과 개념을 하나님 앞에서는 던져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당신에게 보여주실 것이다.

우리가 가야할 길을 우리 스스로 찾을 필요가 없다. 이 믿음의 여행에서 해야 할 것은 단 하나다. 그저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을 이끄시는 대로 내어맡기고 우리의 의지를 사랑하는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받으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완전하고 안전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길 원하신다. 또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우리가 깊이 알기를 원하신다.

 

04. 믿음에서 소망으로; 믿음과 율법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음을 알게 하시고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가 우리에게 은혜 되게 하고 싶으셨다.

율법은 법이다. 법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법의 기능이 그렇듯이 율법은 지키는 자에게는 보호장치가 되지만, 범하는 자에게는 그를 정죄하는 기능으로 바뀌게 된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1,22)

 

아브라함의 의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일을 믿는데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능치 못함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이미 이루어진 것과 다름이 없다'고 믿은 것이다. 즉, 아브라함은 이루어질 일을 믿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미 완성된 일로 믿은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이루어질 일을 믿는 데서 머물지 말고 이미 이루어진 일로 믿어라.

 

온전히 지킬 수도 없는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먼저는 이스라엘과 모든 열방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이고 또한 그 거룩과 공의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노력과 최선으로(율법을 지키려는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율법의 요구 앞에 서 있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야 하고, 그래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데...'

이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헤어나올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산다. 그런데 이 상태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면 죽는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나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나의 행위의 노력으로는 의로움에 이를 수 없다는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 이때부터가 시작이다. 하나님 편에서 살길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나'의 정확한 실상을 보면 살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과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실상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 준비가 된 자는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롭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거룩해진 상태가 아니라 용서받아야 할 죄를 가진 죄인으로서 나아갔다는 사실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믿는 바에 대한 내용이 내 안에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율법으로 받은 선고로 인하여 나 스스로 믿음으로 살려는 노력이 나를 의롭게 하지 못하며 그로 인해 내 믿음의 부도가 내려진 것이다. 절망이다.

 

만약 베드로의 노력이나 최선으로 그 길을 따른다면 그 길을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모든 노력과 최선이 끝이 나는 자리로 그를 이끌어가신 것이다.

그의 믿음에 부도가 내려진 그때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려주신다.

우리는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 은혜를 깨닫기 위해 죄인으로 판명나는 율법의 자리까지 갔다. 그리고 율법 앞에서 우리의 최선과 노력이 우리의 믿음이 아니며 스스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다는 절망적인 선고를 받게 된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인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6)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러나 그의 절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는 소망으로 이어졌다.

인간 편에서의 완전한 절망은 절대적인 은혜를 사모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만든다.

절망에 이른 우리의 상황에서 사탄은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지 못하도록 공격한다.

이제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소망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 불가능함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커보이나 그것은 진리의 빛에 드러난 그림자밖에 되지 않는다.

은혜 안에 내 의지를 드려서.

 

05. 소망에서 사랑으로; 은혜를 알게 하는 소망

믿음은 바라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아직 내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고, 이것은 소망을 의미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_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러나 결코 사람은 절망으로 끝을 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결코 절망으로 끝나게 두시지 않는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먹고살기 위해 땀을 흘리지 않았다. 또한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지를 염려하지 않았다. 오직 영원한 생명을 누렸을 뿐이다. 범죄 이후 생긴 생존본능으로 인해 이 시대에도 세상에서 하는 모든 염려와 걱정은 단지 살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사탄은 이것을 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이 이미 선고된 인간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십자가의 복음을 준비해놓으셨다. 만약 이 진리가 우리의 살고자 하는 소망(믿음)과 만나게 되면 이 지리는 인간에게 실제가 되어 복음 안에서의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된다.

인간의 절망은 반드시 소망을 동반한다.

사탄은 이 위험한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닌 다른 세상의 잡다한 곳으로 향하게 한다.

 

성실을 통해 맺고자 하는 열매,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높아지려거든 낮아지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식하고 현실성 없는 가르침인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은 높은 자리에 앉고 유명해졌을 떄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은 세상의 방법과 원리대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살며 세상이 이해하지 못해도 높은 자리든 낮은 자리든 자신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살아내는 자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감당하지 못할 영향력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에서 영향력있는 그리스도인이다.

교회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각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축복임을 알게 하고, 그 자리를 주님 앞에서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존 5:7)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언제까지 살지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다. 알려주시지 않은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경고이며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지금뿐이라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에게 자신에게는 반드시 내일이 있을 거라고 믿게 만든다.

노후 대책이 아니라 사후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막 13:32, 33)

 

우리는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꿈을 꿔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는 자는 거것이 펼쳐지기 전에 죽어도 기쁨으로 죽을 수 있다.

허상에 믿음을 걸어버리면 그 허상이 실제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살다가 문제가 생김녀 죽기 전에 힘들고 아픈 시간을 거쳐서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잘못된 긍정의 힘으로 "나는 잘될 거야", "나는 괜찮다"라고 반응해버리면 자신의 문제 앞에 직면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안에서의 축복을 누리는 힘은 긍정이 아니라 믿음이다. 언제까지 이 땅에서 살지 모르는 우리는 긍정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살아야 한다.

"주님이면 충분합니다."

주님을 떠난 명예, 권력, 지혜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 14)

 

헛된 꿈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한다.

우리의 소망은 세상의 헛된 꿈과 만나서는 살 수 없다. 우리의 소망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불가능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 하나님의 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만 영광에 이를 수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나님의 의, 즉 살길이 보인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믿음으로 간절히 살기를 소원하는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하나님의 듯을 알게 하는데, 그 하나님의 뜻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절대적인 사랑'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

 

이 말씀처럼 간절히 소망하는 자의 소망이 '부끄러운 바람'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망하는 자에게 강권적으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소망하는 자에게 그분의 사랑을 부어주신다.

 

"하나님이시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3-12)

 

한마디로 소망하는 복인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바라고 소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이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 1:7)

 

인간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나의 개념과 상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도 , 깨달을 수도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시기 위해 나에 대한 깊은 절망앞으로 이끌어가신 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소망하는 자로 이끌어가신다. 그리고 그런 자들에게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의 비밀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06. 사랑에서 소망으로; 사랑을 알게 된 자들의 소망

나에게로부터 나올 선한 것을 소망하지 않는다. 다만 그분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소망한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이다.

그저 주님만 바라고 주님만 소망하고 주님만 계시면 만족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바라고 소망할 수밖에 없는자,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탁된 자가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된 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는 불가능한 우리으 유일한 소망이 되신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우리가 말하기 전,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끼기 전에 이미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 수 있는 모든 길을 열어놓으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데 어찌 우리에게 절망이 끝일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이미 완전한 복음 안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해놓으신 하나님을 소망하자. 그분을 바라고 더욱 바라면 완전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완계를 맺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강하신 손으로 붙드신다 하더라도 우리 편에서 동일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과 끊어지면 죽는다는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 하는가?

그들은 사람의 손이나 도움을 바라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로 자신을 내던졌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안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 15:18-20)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그곳에 계시다면 다른 것 계산하지 않고 그곳에 있을 수 있을까?

용기가 없고 의지가 박약해도 진정 주님과 함께하고픈 소망이 있는지, 주님과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은 간절함이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당신에게도 묻고 있다.

당신은 주님과 함께하고픈 소망이 있는가?

 

07. 소망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간절한 자에게 주시는 선물

소망이 가진 특징은 간절하미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헤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어떻게 도움을 요청하려 가는데 담대하게, 마치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처럼 나아간단 말인가?

살아 계시고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밝히 드러난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말씀 앞에서 스스로는 안 된다는 결론'과 '자신을 도와줄 이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결론'

 

간절함은 담대함이라는 옷을 입고 자신을 도와줄 유일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한다.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간절한 소망을 가지게 된다.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줄 이로부터 거절당하면 끝이기에 죽자 살자 매달리는 것이다. 여기서 소심하게 앉아 있다가는 큰일난다. 아쉬운 편은 우리고, 이것저것 잴 때가 아니다. 다소 뻔뻔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도움을 받아야 살기 때문에 돕는 은혜를 구하러 담대히(간절히)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매우 현실적인 분이시다. 현실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려 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공격을 받을지 다 알고 계신다.

유일하게 도와주실 이(하나님) 앞에 나아오라는 것이다. 나의 의지로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지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 그분께서 나의 의지를 들어서 완전한 믿음의 삶 가운데로 이끄시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연약한 육체 가운데 계셔 보셨기에 누구보다 우리를 이해하실 수 있다. 그분께 도움을 구하라. 간절함으로 나아가라. 우리가 그분 앞에 설 자격이 없는 것같이 느껴질 때야말로 그분 앞에 나아가 도움을 청할 때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아는 만큼 믿어지는 것이다.

주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고, 도피성을 찾아 뛰어가듯 주님 앞에 간절히 나아간 자들을 주님은 지키신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롬 10:11)

 

선물로 주신 믿음은 내가 붙들고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주신 주님께서 친히 지키시고 이루시는 것이다. 우리가 할 것은 가만히 서서 그분을 바라보는 것밖에 없다.

믿음.

은혜로 주신 하나님만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사실 자체는 성장하지 않는다. 믿음은 존재하는 것이다.

믿음은 존재한다. 단지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로 분별할 뿐이다.

 

수로보니게 여인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

그녀는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있다고 지칭하신 자들은 믿음으로 살고자 율법을 지키거나 애를 쓰거나 의로워지려고 했던 자들이 아니다. 단지 소망 없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오직 유일한 소망이 예수님이라 생각하고 찾아온 이들이었다.

 

성화는 우리의 육체를 갈고닦는 것이 아니라 더욱 익숙하게 예수님을 찾고 그 앞에 나아가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려는 노력을 하기 전에 무슨 일만 생기면 무릎부터 꿇는 사람, 주님의 도우심을 매순간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 일상에서 익숙하게 주님을 찾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 말로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이 말씀처럼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결코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연약함 앞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존재적으로 한 번 절망한 사람은 두 번 다시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새롭게 나타난 연약함이든 이전에 갖고 있던 연약함이든 내게 연약함이 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연약함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니 충격받을 것도, 낙심할 것도 없다. 그러날 것이 드러났을 뿐이다. 오히려 그때에 또다시 주님 앞에 엎드리면 되는 것이었다.

"제 연약함이 또 드러났습니다. 이 영역에도 주님이 필요합니다."

더 이상의 절망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절망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소망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다. 약함을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약함으로 하나님의 강하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08. 온전한 믿음으로 누리는 율법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 안에서 우리가 복음을 누리게 하신다.

제일은 사랑이다. 이 온전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고, 온전한 믿음의 삶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누리는 것뿐이다. 시작과 끝 모두가 은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행하는 모든 것이 믿음이며 율법의 행위라는 것이다.

율법은 선악과이다.

율법은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분과 교제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을 확증하는 증표가 되는 것이다.

믿음의 삶에서는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따라서 믿음은 도움을 구하는 자리, 주님을 사랑하고 교제하는 자리로 더욱 나아가게 만든다.

그 자리는 바로 기도의 자리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THE LIFE OF FAITH.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3 PART

09. 주님과의 교제의 자리; 기도

믿음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끌어간다. 하나님의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매순간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분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한 자, 그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는 자가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게 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원하는대로 구하라' 이전에 전제 조건이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여야 한다.

오직 주님, 그분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오직 주인 되신 예수님만을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면 그 믿음을 누리는 우리의 기도제목이 먹고사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가? 그렇다면 누구보다 당신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그분께 맡겨라. 그리고 먼저 구하라고 하신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을 책임지실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기도는 내가 하는데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일하면 사람이 일할 뿐이지만,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When a man works, the man works. But When the man prays, God works)

기도할 때에 내 자격,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된 자격, 예수 그리스도의 자격으로 하면 하나님 수준의 일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로서 살아가는 삶

어떤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가 기도하는 사람인지를 보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기도할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권적으로 이끌어 우리로 증인된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기도란 단지 내가 물 떠다놓고 비는 미신적 행위가 아니라 실재하시는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힘은 오직 기도의 자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떻게 하죠?" "어디로 가죠?" "이거 해도 돼요?"

"주님, 이거 해도 돼요?" "어떻게 해요?" "주님, 뭘 해야 돼요?"

주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 의지할 곳이 주님밖에 없는 사람은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수밖에 없고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은 사소한 나의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은 그분의 뜻대로 기도하기를 기뻐한다.

 

10. 승리의 비결;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만이 우리를 이 세상 거짓의 홍수 앞에서 건져내줄 유일한 소망이다.

사탄에게는 진리를 뒤집을 만한 능력이 없다. 그래서 사탄은 진리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를 거짓으로 속여서 이미 이루어진 진리를 스스로 믿지 못하여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말씀하신다. 배우고 확신한 일이 무엇인가? 성경, 하나님의 말씀, 진리이다. 진리 안에 거할 때에야 비로소 속고 속이는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세워져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선한 싸움의 시작은 흔들리지 않고 왜곡될 수 없는 분명한 진리를 붙드는 것부터이다.

세상의 거친 공격 속에서 지푸라기를 잡으면 지푸라기와 함께 휩쓸려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진리를 붙들면 그 진리와 함께 남는다.

변치 않는 참 진리를 붙들면 진리와 함께 남는 것이다.

말씀 앞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진리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고 그런 의심이 드는 즉시 말씀 앞으로 달려나가라.

"당신은 죽었다.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터위에서 시작된다. 나의 연약함 때문에 이미 이루어진 진리가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나와 상관없이 진리는 여전히 진리이다. '내가 죽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은 사탄이다.

내가 죽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미 이루어진 진리를 붙드는 것이다.

 

음란한 생각, 시기, 질투 등 죄의 소욕들이 올라오는 것은 우리가 새생명 가운데서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의 공격인 것이다.

넘어졌다고 주저앉을 필요는 없다.

복음의 시작이 나의 처절한 죄 됨을 인정하는 것부터라면 새생명된 믿음의 삶의 시작은 내가 회복된 원형임을 신뢰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사탄은 내 약점을 잘 알고 감정의 영역을 자꾸 공략했다.

사탄이 주는 마음을 내가 붙들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믿음으로 하는게 뭔지 모르겠어요"

분별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 가운데서 더 나은 믿음의 결정을 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라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면 될 것이다.

믿음으로 한다는 것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

믿음은 단순하다. 복잡하거나 애매모호하지 않다.

'사람이 보기에도 믿음으로 하는 것 같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틀리지 않은 것을 선택'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보고자 하시는 것은 드러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모습이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한 것이라면 반드시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셨다.

그냥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했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만 믿음이 있다는 평을 들으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믿음이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다만 믿음의 영역은 아주 단순한 태도로 대해야 살아낼 수 있음을 기억하라.

주님은 믿음의 영역을 행위의 어떠함으로 제한하지 않으셨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거침없이 나아가자.

 

우리가 연약하여 실수하고 넘어졌던 지난 시간들은, 오히려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해주는 시간이 된다. 복음안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 가운데 하나는 헛된 것 같은 지난 모든 시간이 전부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었던 은혜의 시간들로 재해석된다는 점이다.

복음이 주는 첫 번째 축복은 기억하기도 싫은 지난 모든 시간을 은혜로 재해석해준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원하시는 믿음의 순종을 올려드리는 것이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겁니다.

 

11. 경외함의 표식; 죄, 회개

경험과 지식이 쌓일수록 두려움과 근심과 염려가 많아진다.

더욱더 연약해지고 더 부족해져서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욱 익숙하게 찾게 되는 것, 나는 이것이 진정한 성화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떠나 느낌과 감정대로 사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의 삶이 나쁜 줄 알지만 계쏙해서 죄에 퍼질러 앉아 있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죄가 죄인 줄 알고 내가 죄인인 줄 알아도 도저히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죄로부터 느끼는 좋은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가 감정적으로 미워지기를, 떠나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죄를 미워하려는 느낌을 기다리지 말고 죄가 더럽고 추악한 것임을 알았 다면 죄에서 돌아서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내가 느끼는 정서와 감정을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 서기로 한 굳은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죄를 감정에 의존해서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 육체를 입고서는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죄를 더럽게 느끼거나 나쁘고 싫도록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나에게 절망으로 다가왔다. 죄를 멀리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왜곡된 나의 상태, 그러면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인가?

이때 필요한 것이 온전한 믿음이었다. 내가 죄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진리를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지긋지긋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죄를 멀리할 수 있는 원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회개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누가 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선이 무엇인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이 다 죄라는 것이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롬 14:23)

 

또한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만 알 수 있는 일이다.

선한 모습으로 위장은 했지만 겉으로 선해 보인다고 하나님 앞에서도 선하다고 인정받을 수는 없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않다면 죄로 여기고 그 자리를 떠나라.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정죄감, 죄책감을 선의 기준을 알려주시는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사인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 된 생명으로서 합당하지 못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시기 위한 도구이다. 그 사인을 받은 우리는 돌이키면 된다.

'아, 이 자리는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리가 아니구나'

변명과 합리화가 쌓이면 선한 양심마저 기능을 상실해서 더는 하나님의 사인을 분별할 수 없게 된다.

죄로부터 떠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을 선택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로 서라.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랑하는 주님께 붙어 있어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 14:27)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분으로부터 오는 징계나 채찍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게에 있어서 멀어지게 하는 요소들을 내려놓기 원하시는 것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가 하나님이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의 마음에 묻어 있는 가치와 충동시키신다.

절대 가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가치는 공존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내려놓을 것을 요구하실 때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뺏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의 태도를 보고 싶으신 것이다. 감정적으로 쉽지 않겠지만 내려놓아야 한다.

은혜를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싸워라.

결론이 없는 생각은 사탄에게 기회를 주는 것

사탄이 음란한 생각을 집어넣는 것을 막을 순 없다. 그러나 새생명을 얻어서 이제 나오 관계가 없는 더러운 생각들에게 마음을 두고 말을 걸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냥 스쳐지나가게 두라는 말이다.

죄의 생각 자체를 붙들고 씨름하지 말라.

이전에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그냥 대강 넘어가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어떤 연약함도 그분을 따르지 못하게 할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12. 관계의 훈련1; 지체 사랑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누리며 살아가는지에 대한 척도가 되는 것이 바로 관계의 영역이다.

기독교는 생명이다. 생명은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확장되고 흘러가게 되어 있다.

죽음은 말 그대로 반응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이 멈춰진 상태이다. 즉, 나를 찌르든 공격하든 무시하든 욕하든 전혀 어려워하지도 않는 상당히 수준 높고 인격적으로 성숙해 보이는 반응이다.

인간의 한게에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나는 죽었지'라는 태도로 지체를 대하면 더 이상 관계의 진전은 없다.

'나는 죽었다'라는 태도로 지체를 대하는 모습은 외형적으로 아주 수준 높은 믿음의 태도처럼 보이나 모두가 이런 태도로 교회 안에 있다면 교회는 공동묘지가 될 것이다.

생명을 가졌다면 반응하게 되어 있다. 치열하게 부딪힐 수도 있고, 때로는 다툴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으로 이어진 공동체는 한 지체의 몸부림이 모두의 몸부림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이 눈에 보이는 지체를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만약 지체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간절히 소망하고 그분의 사랑을 바라보는 이에게는 지체를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주셨다는 것이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감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의지의 결정이 사랑을 확증할 수 있다. 이 말은 감정은 여전히 용납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감정과 상관없이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시는 의지적인 결단을 하셨다. 그 의지적인 결정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것이었다.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감정에 근거한 사랑이 굉장히 효과적일 수도 있지만 그 효력이 일시적이다. 내 감정이 받혀줄 때만 가능한 사랑인 것이다.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사랑하지 않는 차별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하나님께서도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 죄인을 사랑하셨다.

나에게 맞지 않고 감정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은 죄인이던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 기회를 감정의 반응 때문에 놓치지 말자.

 

예수님께서는 지체를 낙담케 하는 자는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뒤어드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막9:42)

 

내가 하나님 앞에 경외함으로 서고 온전한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만이 지체를 낙심시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믿음과 사랑은 대립 구도를 이루지 않는다. 믿음과 사랑은 동일선상에 있다.

만약 정말 사랑이 없는 것이라면 받고자 하는 대로 당신이 먼저 사랑하면 된다.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랑의 자리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다른 지체의 영혼이 낙심할 것이다.

잘 분별해야 할 것은 자신이 지키려는 믿음의 태도가 사실은 자기 고깁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믿음이 견고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그 행위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행하는 모든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누리지 않는 것도 자유이다. 그렇다면 기꺼이 지체를 섬기기 위해 자신이 누릴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진 태도가 아니겠는가?

하나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 태도를 하나님 앞에서 유지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태도를 지켜나가는 것을 통해 온전한 믿음으로 서 있는지를 점검할 수 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롬 14:22)

 

사랑은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다. 즉,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오는 우리의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정직함'이다. 겸손하게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인정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와야 십자가 앞에 설 수 있다.

외식은 자신의 연약함과 존재적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다.(겸손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인정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사형틀이다. 즉 사형선고를 받은 자에게만 필요한 것이다. 은혜가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자에게 십자가의 은혜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외식은 바로 사람의 시선과 평판에 사로잡혀 도움이  필요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정직은 무엇인가? 정직은 기회이지 끝이 아니다.

정직은 내 안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에게서 어떠한 선한 것도 나올 수 없음을 인정하는 정직은 가난한 심령으로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해 준다.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돕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우리의 정직이 단지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감정의 반응을 기대하지 말고 사실을 인정하면 그 정직함 은혜 안에서 온전한 연합을 이룰 것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7:10)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잠14:9)

 

정직은 나의 불편한 속마음을 표현하는 겉 좋은 도두가 아니다. 그저 나로서는 사랑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13. 관계의 훈련2; 권위와 순종

모든 관계는 그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에 맞는 역할이 있고 그에 합당한 태도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직분이나 위치, 그가 가진 권위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더 낮아져서 섬기라고 하셨다.

상하관계에서도 필요한 것은 역시 사랑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창 22:9,10)

 

그 결정된 의지에 가만히 묶여 묵묵히 순종하는 이삭의 순종이 없었다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제사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삭은 반항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옳은 것을 행하려는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제물이 된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가진 것 중에 하나님 앞에 드릴 흠 없는 최고의 제물이었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이것이 그가 죽음 앞에서도 순종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결정과 그 결정을 믿은 순종이 만나, 하나님 앞에 가장 완전한 제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결정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죽음의 자리에 나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라는 거룩하고 가장 아름다운 제사가 완성된 것이다.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서 한 결정이나 순종이 아니라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결정하는 자와 순종하는 자 모두가 이 원리로 맡겨진 자리에 서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권위와 순종은 서로의 본심을 알 때 가능하다. 아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을 알았기에 죽음 앞에서 순종할 수 있었고,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죽음 앞에서 순종할 수 있었다.

남과 상관없이 자신의 위치에 맞게 하나님 앞에서 바른 태도를 취하며 살아야 한다.

 

이 권위와 순종이라는 관계는 각자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다.

'남'이 죽는 것이 합당한 자로 생각하는 자, 모든 문제가 자신이 아닌 남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이다.

반대로 '자신'이 죽는 것이 합당하다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보았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경험한자이다.

자신이 죽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은 자신이 은혜 받은 죄인이므로 어떠한 취급도 감사하게 받겠다는 말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취급을 받겠다는 의미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하지만 죽어야 할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나'였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를 보며 자신이 죽었어야 함을 본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었다. 이 은혜를 본 자들은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거나 남이 틀린 것을 비판하지 않는다.

 

죽어야 할 대상이 '그'에서 '나'로 바뀌면 제대로 된 권위와 순종을 배울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죽어야 할 대상이 '그'에서 '나'로 바뀌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다. 그것은 '너도 살고 나도 살자'고 할 때이다.

그렇지만 가장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 는 태도이다.

치열하더라도 부딪쳐야 한다.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 '나'라는 결론에서부터 은혜 안에서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

 

잘못된 관계 안에서의 태도는 그리스도의 몸 된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만약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과 자신의 뜻을 내려놓지 않느다면 사람을 차별하는 악한 태도뿐 아니라 자시과는 다른 관점으로 보는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자. 그리고 겸손히 귀를 열고 들어보자! 나와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진 지체를 틀리다고 생각하여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

다르다는 것은 서로 맞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풍성함을 나의 고집스러운 생각과 판단으로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 알고 맡겨진 자리에서 낮은 자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께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높이시는 것이지, 내가 맡고 있는 자리가 나를 높여주는 것이 아니다.

'권위'는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섬기는 자리이다.

권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려면 우리의 최고의 권위자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하늘이 보좌이시며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과 같이 되셨다. 그리고 자신을 제한적인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셨다. 한 마디로 낮아지셨다는 말이다. 그분의 권위는 겸손이셨다. 낮아지셨고, 오래 참으셨고 기다리셨다. 하나님의 권위는 이러했다.

권위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임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하셨던 그대로 권위를 행사해야 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권세는 하나님으로 부터 난 것'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합당하게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도록 볼 수 있는 눈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먼저 자신을 점검하라. 자신의 죄에 대하여 철저하고 지체의 연약함에 대해서는 관대하라.

인간스스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기에 인간과 같이 낮아지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그리고 하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 달리셨다.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먼저 섬기라! 그것이 낮아진 자의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이다.

 

오래 참음의 근거는 '사랑'이다.(고전 13:4)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그렇기에 하나님 자신의 입으로 뱉으신 말을 어기거나 바꾸실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바꾸거나 뒤집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언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돌이키면' 용서하시고 돌아보시겠다는 언약이 그들의 공의를 제한한 것이다.

 

순종하여 나아올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먼저는 자기 자신에게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어떻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시며 참아 주셨는지를!

받은 대로 행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오래 참으셨듯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체를 사랑한다면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 하나님의 정확한 때가 될 때까지.

오래 참으라는 것은 죄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는 말이 아니다. 지체의 연약함은 품고 용납하되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공의로워야 한다.

 

죄에 대하여 책망하기를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영혼이 잘 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한 마음이다.

그렇기에 권위자는 하나님의 대리인다운 자세와 당당함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면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서자.

언제든지 교만한 마음과 생각이 들어 지체를 대하려고 한다면 그때는 멈춰 서서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세어보자.

각자가 서 있는 자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직임을 감당하자.

하나님의 권위를 대리하는 지도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드러내는 자다워야 할 것이다.

 

권위에 대하여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태도는 무조건적인 순종과 복종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권위는 '보호'이다. 즉, 어떤 권위에 순종하든지 그것은 그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 즉 '보호'아래에서 돌보심을 받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은 권위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하듯, 하나님이 명하신 것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자를 부당한 일을 행하게 하시거나 망하게 두시지 않느다. 그래서 어떠한 권위 아래 있던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한다면 결과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이다.

 

어떠한 권위에도 순종하리라는 결정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돌보심을 받겠다는 태도이며, 이것은 은혜가 필요한 존재로서의 합당한 태도이다.

권위자나 순종하는 자나 동일한 한 가지의 태도는 '겸손'이다. 자신의 존재를 겸손하게 인정하지 않는 한, 순종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요구하실 때에 '무조건적'이라는 전제를 붙여 놓으셨다.

겸손하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한 자에게 무조건적이라는 전제는 자신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어떻게든 붙어 있어야 하기에 최고의 안전장치가 된다.

또한 모든 상황을 허락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 없이는 순종이 불가능하다.

 

올바른 순종의 첫 번째는 그 순종을 요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순종을 보시기 위하여 모든 상황을 허락하셨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순종하기 위하여 갔던 길이 잘못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순종하려고 한 자를 올바른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이끄시고 교정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순종은 우리를 지키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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