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appyFactory_/Memories_

그렇게 시작됐다_

2007 @ HyeHwaDong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얘기해줄까요?

우선 흰 도화지의 한가운데를 눈대중으로 나눈 다음,
맨 위에서부터 아래 끝까지 줄을 내려 그어요.
이 선은 뭘 의미하냐 하면 왼쪽 벽과 오른쪽 벽을 나누는건데
우선 지금 당장은 평면처럼 보이지만
이 두 벽은 정확한 90도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왼쪽 골목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가려면
90도, 몸을 회전해야 되는 '기역자' 벽인 거죠.

일단 왼쪽 벽에다가는 한 남자를 그려요.
벽 쪽에 몸을 바싹 붙이고, 오른쪽 벽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살금살금 숨바꼭질하듯 눈치를 보고 있는 옆 모습의 한 남자를요.
오른쪽 벽 역시, 마찬가지로 한 여자를 그려요.
여자 역시 벽 쪽에 붙어서 조심스레 누군가를 훔쳐보기라도 하듯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옆 모습 여자를요.
실제 거리는 몇 센티에 불과하지만 90도로 꺽인 벽이기 때문에
상대방은 저 벽 뒤에 누군가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죠.

그림은 그림이기 때문에 그렇게 정지해 있지만 1초 후,
만약 그 두 사람이 앞으로 조금만 움직인다면
코를 부딪치게 될지도 몰라요,
그리고 다시 1초 후, 두 사람 모두 화들짝 놀란 나머지
몸을 정반대로 되돌려 멀리 멀리 뛰어가버릴지도 몰라요.

사랑의 시작은 그래요.
어떤 이상적인 호감의 대상이 한번 내 눈을 망쳐놓은 이후로,
자꾸 내 눈은 그 사람을 찾기 위해 그 사람 주변을 맨돌아요.

한 번 본 게 다인데 내 눈은 몹쓸 것으로 중독된 무엇처럼
그 한 사람으로 내 눈을 축축하게 만들지 않으면
눈이 바싹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거죠.

하지만 이 그림은 혼자서만 애태우는 사랑이 아니라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의 존재 떄문에 애달파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부딪치고 나면 아마도 두 사람은
마음을 터놓으면서 자신의 감정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모르죠.
『사실, 난...... 오래 전부터,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어요.』
이 말을 동시에, 둘이서, 상대방이 똑 같은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두 사람 말이 골목 가득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는 거예요.

이제, 두 사람이 만났으니 서로를 훔쳐보기 위해
수도 없이 벽 모서리에 얼굴을 기댄 자리는 더 이상 닳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다행이예요?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그래요.
한 사람의 것만으론 가 닿을 수 없는 것,
그러기엔 턱없이 모자라고 또 모자란 것,
그래서 약한 물살에도 떠내려가버리고 마는 것,
한 사람의 것만으론 이어붙일 수 없는 것,
한 사람의 것만으론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

자, 지금까지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얘기를 했어요.
이 그림 제목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거예요.

근데 나는 과연
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 이병률 『끌림』중-
728x90

'HappyFactory_ > Memories_' 카테고리의 다른 글

Steve Jobs' 2005 Stanford Commencement Address  (0) 2011.10.10
모두 다 진짜가 될거야  (0) 2011.02.02
생명이 있는 사람_  (0) 2010.06.04
아름다운 마무리_  (2) 2010.03.29
행복한 걸인 사무엘_  (4) 2010.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