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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사랑과 광기의 나날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책이다.

빈센트는 정말로 정말로 어쩌면 정말로 외로움에 허우적 대던 사람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촌누이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깊이는 글 속에서 깊이 드러난다. 일반적이지 않은 그의 '행태'가 자꾸만 상상하게 만든다. '내 남자라면 어땠을까...?' 하고... 빈센트의 사고 체계와 비슷한 정서를 가진 여자라면 이 '남자'에게 미쳐버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도 하지만, 몹시도 일반적이 못한 그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하고 생각도 하게 된다. 하지만 빈센트의 용기와 선택은 때론 몹시도 멋스럽고 남자답기도 하며 그 무모함 때문에 연민이 생기기도 한다.

케이라는 여자가 몹시도 궁금하다. 지치도록 성실했던 빈센트의 사랑을 받던 그 여자의 모습도 삶도 궁금하다. 보여지는 것 때문이 아니었을 것만 같다. 어쩌면 생을 다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마치 죄처럼 여기는 케이의 태도가 그를 더 들끓게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하지만 역시 빈센트의 케이에 대한 사랑은 죽은 형으로부터 숙명처럼 떠앉고 살아야 했던 운명.. 같은 것으로 부터 오는 갈증이 불러오는 사랑의 목마름이었는지 모른다.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빈센트는 분명 영화 속의 아주 아주 독특한 주인공 캐릭터의 모습니다.  

고흐의 편지를 보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표현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떻게 이렇게 문장이 흐드러질 수 있을까...

 

읽어내려갈수록 내면에 대한 탐구가 몹시도 필요해 보이는 사람같다. 내면의 갈등이 끝이 없는 듯 보이나 몹시도 심플하다. 끝없는 외로움과의 사투. 홀로 서기를 기꺼이 할 수 없었던 사람.

놀라운 것은 일본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 흠... 놀랍다. 일본과 비슷한 곳을 찾으려고 머문 프로방스라니... 상상이 안된다.

섬세함을 넘어 더 없이 예민했을 것 같은 사람.. 자신의 아픔을 담쟁이가 엉켜 있는 나무에 비유하던 고흐.. 그러고 보면 고흐의 인생은 담쟁이 넝쿨 같은 인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의 가치를 이해하는데, 빈센트의 삶을 빼놓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냥 그림만 봤을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고흐의 삶을 그저 먼발치서 활자로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그림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정말 두고두고 다시 보고 싶어질 것 같은 책...

 

요한나와 테오의 절대적인 사랑과 신뢰, 지지... 누군가의 헌신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고흐의 인생을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한명이라도 없었던 존재였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가령... 이름모를 창녀에게 위로를 받지 못했더라면... 혹은 마르게리트와의 관계에 문제가 없었더라면...

문들 드는 생각... 점점이 연결된 인생의 조각들 중 하나의 파편이라도 더하거나 덜했더라면... 지금의 고흐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반추되었을까...

 

책을 덮으면서도 가시지 않는 여운들이 깊다.

길게... 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길게... 걸어보고 싶은 네덜란드와 프랑스...


그는 사랑을 갈망했지만 그가 사랑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버렸다.

 

서문

여자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한 늙지 않는다.

1874년 7월 31일(런던, 테오에게)

 

1장 대체된 아이

네덜란드 에텐, 1881년 11월~12월

나는 그녀가 늘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서 경건하게 거기에 몰두한다는 것을 알았어. 그러고 나서 생각했지. 비록 내가 그녀의 감정을 존중하고, 또 그녀의 깊은 슬픔이 나를 감동시키지만 그 속에는 어떤 체념 같은 게 있는 듯 하다고

1881년 11월 7일 테오에게 보낸편지. 사촌 누이와 결혼하고 싶다는 바람을 설명하면서

 

그의 고백 속에서 참된 사랑보다는 감상적인 무모함을 엿보았다.

"'안 돼, 절대 안 돼!'라는 말은 봄날의 대기만큼 달콤한 게 아니라 모질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큰 궁지에 빠졌어. 그녀의 "안 돼, 절대 안 돼!"라는 말에 따라야 할까, 아니면 용기를 내어 포기하지 말아야 할까?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안 돼, 절대 안 돼!"라는 벽에 부딪혀 있지만 지금도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1881년 11월 3일

계속해서 그녀를 사랑하리라.

마침내 그녀가 나를 사랑할 때까지.

 

"정말이지 사랑 때문에 생기는 약간의 고뇌까지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단다. 사람은 때로 절망하고, 마치 지옥에 있는 듯한 순간들이 있는 법이야."

사랑이란 아주 긍정적이고 강하고 현실적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그 감정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목숨을 거두어들이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해.

"누구나 사랑을 한다. 그리고 헤어지고 또다시 사랑한다." 1881년 11월 7일

"진실한 사랑만큼 삶의 현실을 일깨워 주는 것은 없어. 한 남자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새로운 낙원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내 충고를 마음에 새겼으면 해. 사랑하는 여자와 만든 가정은 그 어떤 영양제보다도 너의 용기와 정력, 삶에 대한 사랑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며 나날이 새로운 자극제가 될 것이다. (...) 주위의 여자들을 좀 더 진지하게 주의 깊게 살피고, 그들 가운데 혹시 네가 '오직 그녀뿐'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는지 잘 찾아보려무나. 1881년 11월 9일

 

"사랑 없이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어."

 

 

2장 번쩍이는 갑옷의 기사

네덜란드 헤이그, 1881년 12월~1883년 11월

내게 결혼은 한 번뿐이야. 그리고 그녀와 결혼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그것만이 그녀를 돕는 길이야

테오에게 보낸 편지. 결혼 결심을 알리면서

 

나는 그녀를 사랑해. 하지만 그녀 때문에 스스로 목석이 되거나 마음이 비뚤어지고 싶진 않아. 우리에게 필요한 박차, 그 불꽃이 바로 사랑이지, 또한 그것은 수수께끼 같은 사랑이 아니란다.

그리고 아이도 하나 있어. 그래, 그녀의 삶이 흔적을 남긴 것이지.

내가 살아 있고 다른 사람들도 살아 있기에 내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니겠니?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신비로운 무엇이 있어. 1881년 12월 21일

"사랑이란 거미줄처럼 약하단다. 오직 성실함 위에서만 밧줄처럼 강해진다."

 

 

3장 억울한 누명

네덜란드 뇌넨, 1883년 12월~1885년

누덕누덕 기운 흙투성이의 푸른색 치마에, 비바람과 햇빛에 바래서 묘한 무늬가 진 윗도리를 입은 시골 아가씨가 도시 여자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 만약 그녀가 도시 여자의 옷을 걸친다면 매력은 사라져 버리지

1885년 4월 30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젊은 농촌 여자의 초상을 보내면서

 

 

4장 몽마르트르

프랑스 파리, 1886년 3월~1888년 2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주로 이루어지기 힘들거나 서로 어울리지않는 연애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대체로 수치와 망신을 당한 채 끝나 버리고 말지

무기력한 삶을 염려하는 빌의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사랑이란 우리의 "잠재된 발전"을 "싹 틔우는 힘"이라고 정의 했다.

공부만 하기보다는 시행착오도 가끔씩, 아니 여러 번 겪어 보렴. 1887년 여름 또는 가을

"그림 그리기는 내게 일종의 구원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비참했을 거야."

 

 

5장 고갱을 기다리며

프랑스  아를, 1888년 3월~9월

만약 우리가 고갱의 지원을 받는다면 새로운 시대를 열 아주 훌륭한 계기가 되리라는 것을 알겠니?

1888년 10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 아를에서 고갱의 도착을 고대하며

 

파리에 사는 동안 빈센트는 그 도시가 주는 예술적 표현의 각종 느낌을 모두 빨아들이려고 했다.

일본의 시골 마을과 비슷하다고 확신했다. 그곳이 바로 프로방스였다.

사람은 반대되는 세상도 알 때까지 쉬지않고 노력해야 한다. 1888년 6월 22일

빈센트가 보기에 밤은 낮보다 더 풍부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까만 표면에 하얀 점 몇개를 찍는 것만으로는 밤하늘을 보여 주는 데 불충분했다. 그는 밤에도 카페 밖에서 게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자연의 풍부하고도 위대한 모습을 그리는 것이야 말로 화가의 의무라는 것이 내 신념이다. 우리는 기쁨과 행복, 희망과 사랑을 필요로 해. 1888년 9월

그리고 자기들 눈과 다른 색을 쓰면 미친 사람이라고 불러. 물론 이 모든것은 짐작일 뿐이야. 그래서 나도 온통 노란색으로 그림 하나를 완성했다. 해바라기 말이야. 노란 화병에 열네 송이의 해바라기를 노란 배경에 그렸으니까 지난번의 열두 송이를 청록색의 배경에 그린 것과는 달라.

나는 언제고 위의 그림을 마르세유에서 전시하려고 해. 그러면 몽티셀리가 말하고 실천한 것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겠지. 1888년 8월 27일

 

6장 광기에 빠져 들다

프랑스 아를, 1888년 10월~1889년 5월

어머니는 물론 테오의 결혼을 기뻐하실 거다. 그리고 어머니 외모가 점점 젊어진다고 테오가 편지로 전했어. 정말 반가운 일이다.

1889년 4월 30일, 빌에게 보낸 편지, 자신을 병원에 넣으려 했던 어머니를 용서하면서

 

허위라고 불러도 상관없지만, 그 사물이 이른바 진실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진실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외모와 기질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지만 사상적으로는 놀라우리만치 비슷했다.

177통의 편지에서 고갱의 이름이 605번이나 언급되었다는 점에서도 그가 고갱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알 수 있다.

"두 사람 중 하나는 화산 같고 다른 하나 역시 속으로는 끓고 있었으니 말하자면 전쟁을 하고 있었던 거지"

"물감 상자는 뚜껑도 닫지 않은 튜브가 다 들어가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데, 그렇게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속에서도 그의 캔버스는 빛났네"

사람들이 음악을 들으면서 위로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듯이 색깔을 활용하여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네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속적인 흉내를 피하면서도 특징을 집어내는 동시에 실제와는 낯설게, 꿈속에서 본 정원을 우리 마음에 선사할 수 있단다. 1888년 11월 16일
형의 이상은 너무 많은 분야를 망라하고 있으며 무엇이 인간적인가,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를 면밀히 살피고 있소. 형이 말하려는 것을 이해하려면 모든 인습과 관계된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오. 나는 훗날 세상 사람들이 형을 이해하리라고 믿지만 다만 언제라고 말하기 어려울 뿐이오. 1888년 4월

 

7장 친애하는 요한나

프랑스 생레미, 1889년 5월~1890년 6월

 

 

예쁘고 귀여운 사내아이가 태어날 거예요. 그 아이를 빈센트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1889년 7월 5일, 요한나로부터 온 편지, 자신의 임신을 알려 주면서

 

다시 테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는 자기가 아픈 것을 담쟁이가 엉켜 있는 나무에 비유하면서 그 담쟁이가 무거운 짐이 되기에 좋아하지는 않지만 견뎌 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같은 말로 자기 생각을 표하면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 요한나의 편지 중에서

"아픈것이 가끔은 우리를 낫게 해 준다는 생각을 합니다. 불편함이 심해지면 몸이 정상으로 돌아갈 필요를 느끼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저는 불평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서도 캔버스의 4분의 3이 하늘인데, 그 하늘이 참으로 멋지다! 소용돌이 치는 별들은 빛줄기가 달린 것처럼 힘찬 노란 빛을 발산하고, 치즈 색의 초승달은 연못에 던진 돌이 만들어 내는 물결처럼 흔들리는 황금색의 빛을 발한다.

 

또 한편 숲을 그린 그림에 등장하는 작은 나무들은 담쟁이 덮인 구부러진 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여전히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고통을 암시한다.

시골의 모든 것들은 특유의 언어로 말하고 모든 것이 확실하고 분명하다. 대도시에서는 사람이 지쳐 버리면 갈길을 잃는다.

그나마 빈센트가 다시 사랑의 낭만적 서광과 사랑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요즈음 줄곧 저는 테오와 결혼해서 그를 행복하게 해 주었는지 생각합니다 - 요한나의 편지 중에서
나는 그 기사를 읽고 사뭇 괴로웠단다. 내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 데에 많이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거든. 사람이 칭찬을 받고 칭찬에 취하면 술처럼 교만에 중독된다. 내가 느끼지만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나를 슬프게 만드는구나. 내가 보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란 칭찬 같은 것 없이 작업실에서 혼자 만들어지는 것 같아. 그런데 그러고 나면 언제나 그는 예술가들 속에서 충분히 우정 어린 처우를 받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의 능력을 과장하든지 아니면 너무 무시하든지 하니까. 그러나 나는 믿는다. 결국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믿어.

(...) 소박한 해바라기 그림들은 고마움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내 그림들이 결국에는 고통의 울부짖음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변명하고 싶은 마음을 느낀다. 내가 아직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걸 너는 알 거야. 차라리 농부처럼 빵 한 파운드가 얼마인지 커피 한 파운드가 얼마인지 계산할 줄 아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 1890년 2월 20일

 

 

8장 마지막 거절

프랑스 오베르, 1890년 5월~7월

조금은 두려웠다. 내가 너의 짐이 되는 것을 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까 봐.

1890년 7월 10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테오가 빈센트에게 아기가 아픈 것을 알려 준 후

여름이건 겨울이건 그 아름다운 밤에 빛나는 달과 별을 어찌 잊겠어. 아니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마음이지  -테오의 편지 중에서

빈센트는 7월 29일 새벽까지 신음하다가 서른 일곱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그가 테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제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였다.

 

 

후기 빈센트의 승리

누군가 빈센트의 생각을 이해하고 그가 얼마나 자신을 잘 지켰는가를 알면 정말로 위대한 책이 될 것입니다.

1890년 9월 8일, 테오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친애하는 반 고흐에게

우리는 방금 슬픈 소식을 받고 비탄에 빠졌네!

이 상황에서 그냥 통상적인 위로의 말을 쓰고 싶지는 않네. 알다시피 그는 나의 진정한 친구였으며 나아가 우리 시대의 드문 예술가였으니까. 자네는 그의 작품에서 끊임없이 그를 볼 걸세. 빈센트가 자주 말했듯 돌은 사라질지라도 말은 남을 테니.

나는 내 눈과 마음으로 그의 작품 속에서 그를 보겠네.

진심으로 애도하며,

- 폴 고갱 씀.

"그녀는 아주 완전한 시기에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 시기가 일렀더라면 나느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나중이었다면 너무 늦을 뻔했다. 오늘 나는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으며 그녀를 통해 지금까지 가 보지 못한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 매일매일 그녀에게서 듣는 일상의 대화는 그 어떤 방법보다도 확실하게 나로하여금 그녀의 부족을 이해하게 해 준다."

 

 

[연표]

1853 3월 30일 네덜란드 호로트 준데르트에서 출생. 꼭 1년 전 같은 날 사산한 아기 이름을 따라 빈센트라고 불림.

1857 동생 테오의 출생. 빈센트는 죽을 때까지 동생과 깊은 유대 관계를 유지함.

1869 화상인 호우필 회사의 헤이그 지점에 직원으로 고용됨. 그곳에서 그는 젊은 관리인 H.G. 테르스테흐 및 그의 가족과 절친한 친구가 됨.

1873 호우필 회사의 런던 지점으로 전근. 전도유망한 직원으로 시작했으나 하숙집 주인 딸 유진 로이어에 대한 사랑이 거절당하자 성격이 음울해지고 고객들과 자주 다투게 됨.

1875 호우필의 파리 지점으로 옮겨 직장 동료이자 영국인인 글래드웰과 우정을 쌓음.

1876 고객들과 언쟁이 늘고 종교적 열성으로 인해 호우필에서 해고됨. 영국으로 돌아가 램스게이트 및 종교 교육을 강조하는 아일워스에 있는 학교의 무보수 선생으로 일함.

1877 네덜란드의 도르드레흐트에 있는 서점에 취업. 고객들의 책 선택에 대한 비판과 광신적 신앙으로 인하여 해고됨.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감.

1878 신학 시험에 낙방한 뒤,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 지역에 전도사로 감.

1879 돌발적인 행동과 광부들의 근로 조건 개선을 위한 시위 선동으로 전도사 직에서 해고됨.

1880 그림 그리기를 시작함. 대부분 어둠침침한 색조로 그림., 브뤼셀의 미술 학교에 입학함.

1881 에텐에서 부모와 함께 살며 계속 그림을 그림. 사촌 케이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거절당함. 이름 모르는 창녀에게 위안을 받음.

1882 헤이그로 옮김. 그곳에서 가난하고 임신 중인 창녀 클라시나 시엔 호르니크를 만나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됨.

1883 시엔과의 관계를 끊고 드렌터로 옮긴 후, 다시 뇌넨으로 이사한 부모와 함께 살기 위해 거처를 옮김.

1885 가장 중요한 그림들 중 하나인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림. 연상의 마르호트 베헤만과의 연애가 그녀의 자살 기도로 이어져 끝남. 어린 모델 호르디나(스틴) 드 흐로트의 사생아의 아버지로 부당하게 비난받음. 아버지가 사망한 후 뇌넨을 떠남.

1886 안트베르펜의 미술 교실에 입학하였으나 지도교사와 다투어 퇴학당함. 파리로 옮겨 몽마르트르에서 화상을 하던 동생 테오와 함께 살며 그림을 계속함. 많은 인상파 및 후기 인상파 화가들, 특히 고갱과 친교를 맺음.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림이 밝은 색조를 띠게 됨.

1888 프랑스 남쪽 아를로 옮겨 고갱과 함께 지내기 시작함. 미술 기법에 대한 과격한 논쟁이 잦아져 둘 사이의 우정이 서서히 흔들리게 됨. 12월 23일 고갱이 갑자기 집을 나가자 빈센트는 면도날로 그를 위협하고 자신의 귀를 잘라 동네 창녀에게 줌. 정신 쇠약으로 고생함.

1889 자진하여 생레미에 있는 생폴 요양원에 입원함. 고갱이 떠날 때 일으켰던 발작을 계속해서 일으킴. 테오의 아내 요한나로부터 임신 소식과 함께 태어날 아이가 아들인 경우 빈센트라고 이름 지을거라는 소식을 들음.

1890 의사가 반대하는데도 요양원을 떠나 대자와 요한나를 만나기 위해 파리로 감. 그리고 오베르로 옮겨 가셰 의사의 담당 환자가 됨. 의사의 딸 마르게리트와의 관계 때문에 의사와 불화를 겪음. 또한 자신이 동생에게 재정적 부담이 된다는 느낌을 받고 7월 27일 늦은 오후 오베르 근처 밀밭에서 자신을 권총으로 쏨.

7월 30일 새벽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사망함.

 

빈센트의 숨결이 머문 곳

자유분방한 몽마르트르에 이어 그림 같은 마을들이 있는 아를, 생레미, 생마리드라메르, 그리고 오베르를 방문했다.

프로방스 아를

걸어서 갈 수 있는 곳들로 그 유명한 랑글루아 다리, 시인의 정원, 밤의 카페 그리고 노란 집도 볼 수 있다.

프로방스 생레미

관광 사무소와 책방에서는 빈센트 그림에 등장하는 장소를 소개하는 지도를 준다. 걸어갈 수 있는 범위,

요양원에서부터 시작된 길은 산길을 지나 아름다운 포도 농원인 마드라담에 이르는데, 그곳을 빈센트는 눈부신 가을 색깔로 그렸다.

카마르그 생마리드라메르

고색창연한 초가지붕 집들이 아직도 몇 채 남아 있어 휴가온 관광객들에게 빌려 준다.

파리 근교, 오베르쉬르아즈

담장으로 둘러싸인 빈센트의 묘지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 그곳은 빈센트가 자신을 총으로 쏘았던 밀밭에 둘러싸여 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타히티, 고갱 미술관

 

[빈센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로스앤젤레스의 게티 미술관

필라델피아의 반즈 재단

크롤러뮐러 비술관 - 네덜란드 오테를로 소재. www.kmm.nl

반 고흐 미술관 Van Gogh Museum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소재. www3.vangoghmuseum.nl

 

옮긴이의 글

그러나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의 그를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삶에 있어서 삶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랑에서 끊임없는 좌절과 배반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간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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